나는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 청수
내가 어릴 적 자란 곳은 서울 후암동이었다. 그곳은 서울역이 가깝고 남대문도 가까운 말하자면 서울 시내였다. 그 시절에는 왕십리는 시골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우리 집은 이층집이었는데 일본사람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이라고 불리던, 거실과 이층에 다다미가 깔린 집이었다.
이등방문의 별장이었다는 대궐 같은 집이 우리 집에서 몇 집 건너 가까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의 강남쯤 되는 꽤 괜찮은 동네에 속하였다.
거기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내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동안 많은 집에서 살아봤지만 그 집에서처럼 행복했던 시절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흥부와 놀부’라는 동화책을 읽었던 것도 그곳이었고 우리 집 이층에 살던 젊은 화가부부가 이사 가면서 두고 간 '뭉크'의 '절규'를 본 것도 그곳이었다. 처음 ‘절규’를 봤을 때 어린 나이에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그림이 노르웨이의 국보급 그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으니 어릴 적에 너무도 강한 문화적 충격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는 과자가 없던 시절에 미제 크래커라는 과자를 처음 먹었을 때의 고소하던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동그라면서 가운데가 뚫린 색색의 드롭프스와 지금의 가나 초콜릿의 원조인 바둑모양의 초콜릿은 입에서 살살 녹았던 기억이 새롭다. 일회용 커피는 찢어서 보니 새까맸는데 손가락으로 찍어서 먹어보니 아주 썼던 기억은 어린 나에게는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그 집에서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문화적 체험을 골고루 하였다. 그 당시에 흔하지 않던 이층집에서도 살아봤고 침대에서도 자다가 떨어지기도 하였으며 앉은뱅이책상이 아닌 의자가 달린 책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친구들과 공기놀이 땅따먹기와 사방치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놀고는 하였다. 내성적이어서 조용하던 나는 그 때도 고무줄놀이는 하지 않았다. 좋아도 하지 않았으며 잘 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 동네 집들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윗집 아랫집, 맞은 편 집 그 집의 위아래 집, 그 맞은 편 집 등 친구 따라 엄마 따라 거의 다 가봐서 집의 구조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공주처럼 살았던 곳
행복이 햇살처럼 퍼져있고 평화가 안개처럼 깔려있던 그 집이 그립다.
나에게 능력이 주어진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그곳에서 아니 그 집에서 살고 싶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이사를 안 간다고 하면 사정을 해서라도 떼를 써서라도 나의 여생을 그 곳에서 그 집에서 보내고 싶다.
그것은 근심걱정 없던 시절, 부모님에게 받기만 했던 사랑이, 재미있게 놀던 친구들이 그리워서 잊지 못하는 추억의 앨범이 있기 때문일 게다.
지금 내가 그 곳에 아니 그 집에 산다고 해도 부모님도 안 계시고 친구들도 하나도 없으니 그 곳은 그 집은 내가 평생 꿈꾸는 나의 고향, 영원한 나의 본향으로만 머무를지도 모르겠다.
아! 그래도 나는 그곳에 가고 싶다. 아니 그 집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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