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실비 - 오탁번(1943 ~ )

푸른물 2010. 5. 22. 09:15

실비 - 오탁번(1943 ~ )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 한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 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연초록의 새싹들이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설핏 눈트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신록이 산야(山野)를 뒤덮었다. 초록도 다채로운 저마다의 색깔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그래서 이 시는 환한 초여름 대낮 속으로 생식의 상상력을 활짝 펼쳐 보인다. 사물을 앙증맞게 소리로 드러내는 어울림들, 그러나 가뭄 속으로 ‘실비’는 감질나게 잠깐 내리다 만다. 가볍고 순연한 상상력과 투명한 시심이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합심해 이 나라의 화창한 초여름 산천을 그려낸다. <김명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