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 장석주(1954∼ )
흑염소 떼가 풀을 뜯고 있다.
어둑했다.
젊은 이장이 흑염소 떼 끌어가는 걸
깜박했나 보다.
내 몸이 그믐이다.
가득 찬 슬픔으로 앞이 캄캄하다.
저기 먼 곳이 있다.
먼 곳이 있으므로 캄캄한 밤에
혼자 찬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해가 다 저물도록 젊은 이장은 풀어놓은 흑염소 떼를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바쁜 일이 겹쳤나 보다. 어둑하니 풀을 뜯고 있는 염소들을 바라보며 나는 혼자된 저녁을 먹고 있다. 찬밥이 모래를 씹는 듯 어석거리는 이 저녁의 식사는 몸속에 어둠을 채워 넣는 듯 곤혹스럽기만 하다. 캄캄한 밤은 삶의 어떤 고비에서 겪어야 하는 슬픔처럼 다가오지만, 그러나 이 그믐이 한 달의 끝자리가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이루어야 한다는 의지보다 견딘다는 막막함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서는 시(詩). <김명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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