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1 -조정권 (1949 ∼ )
꽃씨를 떨구듯
적요한 시간의 마당에
백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이 놓고 간 물음.
시인은 그것을 10월의 포켓트에 하루 종일 넣고 다니다가
밤의 한 기슭에
등불을 밝히고 읽는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의 뜻.
공손하게 달라 하면
조용히 대답을 내려 주신다.
생의 절절한 물음에 스스로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 바탕을 진실로 깨끗한 백지로 남겨두어야 한다. 이미 많은 것을 옮겨 심어 어지러운 미망(迷妄)에는 말씀이 씨로 내린들 신(神)의 꽃씨 싹 틔울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생의 신음은 절절한 간구에도 기록되지 못하니, 백지를 앞질러 모두 경작해버린 탓이다. 공손함조차 저버린 욕망으로 빼곡 채운 어지러운 마음을 받아 든들 누가 그걸 읽어낼 수 있으랴! 시를 향한 외로움이 백지 위에 그리운 말씀들이 내려앉게 한다. <김명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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