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 목 적시던 '그 물' 이젠 慈善으로 세계 적셔
1240년대 수도원 자급용서 전염병 돌자 주민 식수로…
벨기에 생산업자에 넘겨 거액 로열티 받는 수도원
방글라데시 등 빈국 지원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유럽. 오늘날 지구촌 시민들이 향유하는 각종 상품, 서비스의 원조(元祖)는 대부분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정 상품 명칭이 탄생지인 유럽의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딴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유럽의 조그만 마을에서 탄생, 글로벌 상품으로 도약한 브랜드의 고향을 찾아 유럽인의 지혜를 더듬어 본다. 세계 최대의 맥주회사, AB인베브가 생산하는 수백종의 맥주 중 최고의 '프리미엄' 브랜드는 레프(Leffe)다. 한국에선 르페로 불린다. 이 브랜드의 어원(語源)은 벨기에의 한 마을 이름이자 수도원 이름에서 유래했다.
구시가지에서 강변 도로를 따라 500m쯤 내려가자 오른편에 레프 맥주 라벨에 등장하는 수도원 종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원은 세계적 맥주의 탄생지란 점을 굳이 내세우지 않고 얌전히 숨어 있었다. 성당 입구 벽에 A4 용지 크기로 '레프 맥주의 산실'이라고 써놓은 검은색 안내판마저 없으면 찾기조차 힘들 듯했다.
수도원 입구로 들어서자 700년여 전부터 맥주 양조에 쓰였다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에선 지금도 물이 콸콸 쏟아졌다. 자신을 브뤼노 수사라고 밝힌 수도사는 "옛 맥주 제조 시설은 프랑스대혁명 때 대부분 파괴됐고 현재 수도원에선 맥주를 안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수도원은 지금도 레프 맥주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수도원은 맥주 제조법을 제공한 대가로 매년 거액의 로열티를 받고 있고, 이 로열티로 다양한 자선활동을 펼치고 있다. 브뤼노 수사는 "로열티 수입은 방글라데시 등 빈국(貧國)의 보건과 교육 관련 사업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고, 디낭 지역의 병원과 양로원 운영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 ▲ 벨기에 남부 도시 디낭에 있는 레프 수도원이 1240년대에 장티푸스균에 오염되지 않 은‘안전한 물’이라며 만들기 시작한 레프 맥주는 이제 벨기에를 상징하는 관광 자 원이 됐다. 사진은 레프 수도원 종탑./레프=김홍수 특파원
디낭 시민들은 레프 수도원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갖고 있었다. 구시가지 카페 주인 안느 페리에(Perrier)씨는 "수도원이 자선사업을 많이 해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수도원에서 탄생한 동네 맥주가 스토리텔링(수도원의 역사), 이미지 관리(자선활동), 자본(대규모 투자)이 적절히 결합되면서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한 것이다. AB인베브 측은 "2008년 세계적 불황으로 맥주소비가 5%가량 줄었지만 레프 맥주는 전년대비 5% 이상 매출액이 늘어나며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