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높은 서울여대 '스웰' 영어 합숙훈련 현장
한국말 외마디도 '벌점'감독관 12명 24시간 감시
수강생 20~30%가 낙오 직장인 휴직하고 참가도
지난달 29일 오전 6시40분 서울 노원구 서울여대 기숙사 B관. 정적이 감도는 2인용 침실(4㎡) 스피커에서 미국 록 밴드의 허스키한 고함소리와 전자기타 굉음이 터져 나왔다. 기상 시간을 알리는 미군 라디오 방송(AFN)이다."오 마이 갓!"
기숙사 2층에서 6층까지, 층마다 10여개씩 붙어 있는 방문이 하나 둘 열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새 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머리를 덜 말려 티셔츠가 흠뻑 젖은 여학생, 부스스한 머리를 푹 눌러쓴 모자로 감춘 남학생 등 160여명이 하품을 하며 1층 식당으로 우르르 내려갔다. 가슴팍에는 'David(데이비드)' 'Olivia(올리비아)' 같은 영어 이름이 적힌 손바닥만한 명찰이 붙어 있었다. 핫 케이크와 토스트, 우유 한 잔을 앞에 둔 이들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엄마야!" 이주연(19·부산대 1년)씨가 식당에 들어서다 철퍼덕 미끄러졌다. 감독관은 괜찮냐며 일으켜주는 대신 싸늘한 얼굴로 옐로 카드를 내밀었다. "페널티(벌칙)!"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한국말 비명이었지만 감독관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벌점 10점을 줬다. 스스로 받아들인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여대가 1995년부터 마련하는 여름방학 영어 합숙훈련 '스웰(Swell)'은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전국 10여개 대학이 하계 영어 합숙 프로그램을 내놓고 있지만 빡빡한 교육 일정과 군대 뺨치는 엄격한 규율 면에서 서울여대의 스웰을 따르지 못한다.
수강생 대부분은 대학 3~4학년 취업 준비생들이다. 서울·부산·대구·인천은 물론 멀리 거제도에서 올라온 학생도 있다. 6월 30일 입소한 이들은 "8일까지 40일 동안 우리는 '영어의 노예'"라고 말했다. 수강료는 280만원. 요즘 같은 경제난 속에서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 ▲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말문이 막혀 속이 타들어가도 한국말은 절대 금지다.‘ 영어완전정복’을 위해 서울여대 영어 합숙훈련‘스웰(Swell)’에 등록한 참가자들이 지난 29일 원어민 회화수업을 듣고 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1~7단계로 수준별로 나뉘는 수업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이한나(30) 감독관은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일요일 오후 4시까지 외출할 수 있지만 일요일마다 시험이 있어 수강생 대부분이 기숙사에 남아 공부를 한다"고 했다.
박재령(19·인하대 1년)씨는 "한참 자고 있는데 감독관이 들어와 '한국말로 잠꼬대를 했으니 벌점을 받으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같은 학교의 이형원(19)씨는 "영어 스트레스가 극심하다"며 "얼마 전에는 가위에 눌렸는데, 꿈에 나온 귀신조차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고 했다.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이 적발되면 벌점 10점이다. 수업이나 저녁 점호 시간에 늦어도 벌점을 받는다. 몰래 휴대전화를 사용하면 정학이다. 수강생 중 20~30%는 중간에 낙오한다. 벌점이 25점을 넘으면 집으로 '경고장'이 날아간다.
스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정인주(55) 외국어교육원 부원장은 "벌점이 40점을 넘으면 2박3일 정학을 맞는다"며 "정학 두 번이면 합숙소를 나가야 한다"고 했다. 매주 집으로 성적표가 배달된다. 100점 만점에서 평균 75점을 넘지 못하면 교육을 마쳐도 수료증을 받지 못한다.
오전 7시20분 기숙사에서 100여m 떨어진 강의실에서는 '조기 수업'이 한창이었다. 발음이 명확하지 않다고 전날 수업에서 경고장인 '오렌지 카드'를 받은 학생 4명이 미국인 교사에게 일대일로 발음을 교정받고 있었다. 파란 눈의 여교사가 "fresh fish(신선한 생선)!"를 발음했다. 적잖은 토종 한국인을 좌절시키는 'f'와 'sh' 발음이다. 학생들은 "후레시 휘시!"와 "프레쉬 피쉬!"를 오가며 헤맸다.
오전 8시, 말하기·쓰기·토론으로 이뤄진 정규 수업이 시작됐다. 수강생들 자신의 영어 실력에 따라 각기 다른 반에서 강의를 받고 대화를 나눈다. 최고급 반인 7단계 수강생들이 대북·환경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일 때, 중하위권 반 수강생들은 더듬거리며 "와이(why)?" 같은 짧은 단어만 내뱉었다. 영어로 '새치기'를 표현하지 못해, '새'를 뜻하는 '버드(bird)'와 '치다'를 뜻하는 '히트(hit)'를 결합한 "버드히트"란 신조어를 외치는 학생도 있었다. 시청각 수업, 영어 연극 등으로 이뤄진 오후 수업이 5시에 끝났다.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마치자 곧바로 쪽지시험이 시작됐다.
송여준(26·서울산업대 4년)씨는 저녁식사도 거른 채 기숙사 계단에 쪼그려 앉아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그는 "짧은 기간에 영어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작년에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이곳에 모두 쏟아 부었다"고 말했다.
직장인 수강생도 있었다. 작년 12월 둘째 딸을 낳고 육아휴가 중인 항공사 승무원 한주영(32)씨도 그중 하나였다. "요즘 후배들이 영어를 너무 잘해요. 가만 있으면 뒤처질 것 같아 불안해서 휴가를 이용해 이렇게 왔어요. 두 딸이 보고 싶지만 40일 동안 꾹 참아야죠."
회계법인 간부인 장모(34)씨는 회사의 양해를 얻어 6주간 휴직하고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영어를 못하면 승진이 불가능해요.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새벽 1~2시까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갑엔 활짝 웃는 3살 난 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