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비전] 우체국 아저씨 이야기신경숙 소설가·최근작 '엄마를 부탁해'

푸른물 2009. 8. 5. 07:22

문화비전] 우체국 아저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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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7.31 22:21 / 수정 : 2009.07.31 23:36

신경숙 소설가·최근작 '엄마를 부탁해'

"아직 일을 더 하고 싶은데 이젠 퇴직해야 한다
미국 공부 간 아들에게 돈도 더 보내야 하는데…
그나마 취직에 성공한 딸이 빨간 티셔츠를 사왔다
내 삶은 세상을 바꿨는가"

택배를 보낼 일이 있어 우체국 택배에 방문 요청을 했다. 사인된 책 50권을 보내는 일이었다. 오후 3시쯤 우체국에서 아저씨가 오셨다. 책 50권이 어디 보통 무게인가. 게다가 상자가 뜯어져서 테이프로 다시 붙여야 하고 무게가 넘쳐서 나눠야 하는 등등의 수고로움을 아저씨는 밝은 얼굴로 척척 해내셨다.

프랑스의 시골마을에 우편배달부가 오면 문간에서 포도주니 코냑을 한 잔씩 내놓는 통에 편지를 다 배달한 우편배달부가 마을을 떠날 즈음엔 취해서 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술은 안 되겠어서 물 한 잔 드릴까요? 물었더니 좋지요! 하셨다. 덕분에 문간에 앉아서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일을 즐겁게 하시네요, 했더니 즐겁지요, 즐겁고 말고요, 이 일 해서 내 자식들 다 공부시켰는데요, 그런데 이 일도 내년까지밖엔 못해요! 하셨다. 왜요? 물으니 퇴임이에요, 더 하고 싶어도 못해요. 모자를 벗으며 땀방울을 닦는 모습이 여간 섭섭한 눈치가 아니었다. 자그마한 키, 짧은 머리에 싱글벙글 웃고 있는 동안(童顔)이셔서 퇴임을 앞두고 있는 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저씨는 스물한 살에 수안보에서 서울로 올라와 우편배달부가 됐다고 했다. 함께 우편배달부가 되자고 시험을 쳤던 형뻘 되는 이는 떨어지고 아저씨만 합격했단다. 군대에 간 3년 빼고는 지금까지 거의 40년을 이 일을 하며 지냈다고 했다. 서울에 자신의 발자국이 안 찍힌 마을은 없을 거라고도 했다. 젊은 날에는 인기도 만점이었단다. 그때 옥인동은 달동네 마을이었단다. 이런 여름날 '체신부'라고 찍힌 커다란 가죽가방을 어깨에 메고 땀 뻘뻘 흘리며 고갯길을 올라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에 들어왔다 가라고 붙잡곤 했단다. 아저씨 표현에 의하면 그때는 집집마다 수도 대신 뒤안에 옹달샘이 있어서 아저씨를 옹달샘 앞으로 데리고 가 등목을 시켜주는 할머니들도 있었고, 참외며 수박이며 자두 같은 것을 먹고 가라고 이집저집서 내놓는 통에 마을을 벗어날 즈음엔 배가 이만큼 불렀다며 주소를 적어 넣던 볼펜을 쥔 채로 두 손을 배 앞으로 내밀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웃으셨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지 열심히 살았지요, 중학교밖에 못 나와서 이 일을 천직으로 여겼어요. 일을 더 하고 싶은데 규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요, 하신다. 내가 아저씨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니 내처 자식들 자랑도 하신다.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 중인데 얼마간 공부를 더 해야 한단다. 당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못했기 때문에 아들은 공부는 계속하게 해주고 싶단다. 돈을 계속 보내야 할 텐데요, 하니 그래서 내가 일을 더 해야 하는데…. 얼굴에 근심과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딸은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다고 했다. 취직이 어렵다던데 잘했네요, 했더니 학교 졸업하고 4개월 동안 취직이 안 돼서 딸애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그런다. 겨우 4개월 가지고 뭘요? 하니 딸애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못하고 있으니 바깥에 나가려고도 안 하더라고요. 요새는 인터넷으로 이력서 같은 거 접수하고 하잖아요. 서류 접수시켜놓고 떨어지면 코를 빠뜨리고 있는 거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럽더니 다행히 잘 됐어요. 첫 월급 타서 빨간 티셔츠를 사가지고 왔어요.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그걸 입으라고 사왔는지 원….

말씀은 그리 하시면서도 입가엔 생각만 해도 딸애가 대견한지 웃음이 함박이었다. 아마도 퇴근만 하면 그 빨간 티셔츠를 입고 계실 것 같았다. 퇴임하면 시골에 가서 살고 싶고, 그러려면 지금부터 농사지을 땅도 알아보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내가 그럴 생각이 아니어서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아저씨의 꿈이 이루어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아저씨는 땅을 가져도 지난 40년간 우편물을 열심히 배달했듯이 그 땅에 뭔가를 열심히 가꾸어 나갈 것은 분명해 보였다. 세상의 변화는 잘나고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제자리에서 이렇게 성실히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나간 분들에 의해 변화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다 마시고 무거운 책을 어깨에 턱 짊어지고 문간을 나가던 아저씨가 무엇에 홀린 듯 감동받은 얼굴로 서 있었다. 뭘 보고 계시나? 싶어서 나도 따라나가 보니 지난봄에 채소 씨앗을 사러 나갔던 농원에서 물옥잠(나는 부레 같은데 농원 주인은 한사코 물옥잠이라 했다)이 보이기에 생각 없이 사다가 버려진 유리확 속에 담가두고는 잊었던 것이 이 무더운 여름날 꽃대를 뚫고 보라색 꽃이 몇 개나 올라와 있었다. 주인의 무관심 속에서도 제 할 일을 끝내 이루어낸 아름다움이 고마워 아저씨를 보내고도 한참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