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떴다! '라디오 실버 스타'변희원 기자 nastyb82@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

푸른물 2009. 7. 30. 11:46

떴다! '라디오 실버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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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7.23 04:15

서울 노인복지센터 찾은 노인들을 위한 방송 진행 8개월째
방송진행 수강생 출신들 대본·큐시트 직접 만들어 "꿈꾸던 DJ 너무 즐거워"

"이번 신청곡은 손인호의 '하룻밤 풋사랑'입니다."

21일 오전 11시쯤 서울 종로구 안국동 서울노인복지센터 3층 라디오방송 스튜디오. 옛 가요 '하룻밤 풋사랑'이 흘러나오자 스튜디오 앞에서 방송을 듣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40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들고 춤을 췄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가 하면 "마이크를 달라"고 요구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프로그램 진행자 강영자(67)·권호영(68)씨는 스튜디오에 난 유리창을 통해 이 광경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은발 DJ(디스크자키)'가 진행하는 노인들을 위한 라디오방송이 복지센터를 찾은 '은발 관객'을 상대로 전파를 타고 있다. 이날 공개방송은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노인대상 시민문화예술교육사업 '꿈꾸는 청춘예술대학'에서 진행하는 20개 프로그램 중 하나인 '라디오 실버스타' 수강생 10명이 만들었다. 수강생 중 강씨와 권씨, 조용서(82)·동우자(65)씨가 진행을 맡고, 꿈꾸는 청춘예술대학의 합창반·하모니카반·아코디언반 등의 학생들이 게스트로 출연해 생방송으로 연주했다. 스튜디오 앞에 놓인 벤치에는 은발 관객 40여명이 찾아와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열띤 반응을 보냈다. 오전 10시 반에 시작해 오후 1시가 넘어서 끝난 이 방송은 3층짜리 본관과 별관의 강의실과 사무실을 제외한 센터의 모든 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DJ들은 작년 9월부터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라디오 진행방법·발성·대본쓰기를 배웠고, 그해 12월부터 자신들이 직접 작성한 큐시트(cue sheet·방송 진행순서 일람표)와 대본으로 매주 화·목요일 오전 11시 반부터 1시간 동안 방송을 진행해 왔다. 연면적 5534.21㎡ 규모의 센터 본관과 별관에 하루 평균 3000~3500명이 찾아오는 데다 점심시간에 방문객이 가장 많다고 하니, 이들은 '황금시간대'를 차지하고 방송을 한 셈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비로소‘라디오 스타’의 꿈을 이뤘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건강 백세’라는 구내 라디오 방송 DJ를 맡고 있는 조용서(왼쪽)씨와 동우자씨가 21일 오 전 공개방송을 진행하고 있다./변희원 기자 nastyb82@chosun.com

수강생 10명 모두 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수강하게 된, 라디오 방송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DJ 중 최연장자 조용서씨는 평소 '건강백세'라는 건강관련 프로그램을 이 복지센터에서 진행한다. 물류·운송회사에 다녔던 조씨는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에 대한 동경이 컸다고 했다. 조씨는 라디오 실버스타 수업 외에도, 미디어(동영상 제작)·마임 수업을 듣고 있다. 그는 "남들이 보면 다 똑같은 노인일지 몰라도,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 하나하나 개성이 강하고 재능도 많다"고 했다.

조씨의 파트너인 동우자씨는 성우 출신답게 안정된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으로 전문가 같은 진행 솜씨를 뽐냈다. 그녀는 "DJ들이 실수할 때도 많은데 청취자들이 신이 나서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다"며 "어르신들이 '아빠의 청춘'(백승태) '방랑 김삿갓'(김정단) 같은 인기곡이 나오면 춤추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DJ를 계속하게 된다"고 했다. 동씨는 그러면서도 "주위에 DJ로 일한다는 사실을 아직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아들한테도 말한 적 없어요. 내가 고상한 엄마인 줄 알고 있거든요."

반면 권호영씨는 라디오 진행 후 39세 큰아들과 '진정한' 대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시사문제 등에 대한 대본을 쓰다가 아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뭘 이런 걸 하시느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잘 도와준다"며 "내가 쓴 대본으로 갑론을박하다 보면 어느새 부자(父子) 간에 공감대가 만들어진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 이야기'와 '흘러간 추억의 노래'와 같이 관심을 갖는 주제를 갖고 방송을 한다.

"원래 많았던 호기심과 의욕이 나이가 들었다고 줄진 않더군요." 그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왜 이런 걸 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살면서 못해봤던 걸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말했다.

방송을 진행한 지 반(半)년이 넘었지만, 이들은 매번 긴장 속에서 입을 연다고 한다. 이들의 대본과 큐시트는 형광펜과 볼펜 자국 탓에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강영자씨는 "처음엔 헤드폰을 거꾸로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본을 잘못 읽는 건 다반사"라며 "요즘도 긴장감에 입이 말라서 방송 내내 물을 들이켠다"고 했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던 강씨가 DJ를 하겠다고 했을 때 친구들과 가족은 "(나이 먹어서) 그걸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걱정부터 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춤추고 노래하는 수업을 같이 듣자고 해요. 그래도 난 DJ 하는 게 제일 재미있는 데다 여기에 재능도 있다는데, 당연히 이걸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