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수원 행궁길, 예술이 행차하는 길…

푸른물 2009. 6. 7. 07:30

수원 행궁길, 예술이 행차하는 길…
한때는 시들어가던 동네… 주민 나서 마을 되살리기
갤러리·예술가 몰려들어 카페·술집 등 개성 넘쳐
수원=김우성 기자 rahar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여기가 예전에 빈집이었는데 최근 카페가 들어섰죠. 예쁘지 않나요?"

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행궁길을 같이 걷던 장병익 한우물주차장 사장이 길 맞은편에 서 있던 작은 카페 판자꾸떼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틴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는 주인 이광웅씨가 직접 만든 장신구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장 사장의 '자랑'은 한 걸음 뗄 때마다 이어졌다. 골목 안으로 들어갈수록 색다른 카페와 공방, 갤러리가 튀어나왔다.

2003년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오던 수원 행궁길이 바뀌고 있다. 이 일대엔 가빈갤러리·씨드갤러리 같은 미술관과 행궁공방·찻집 등 고풍스러운 공간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전통적 색채가 강한 서울 인사동과 젊음의 활기가 가득한 서울 홍대 거리의 중간쯤 되는 모습이다. 한때 상인들이 빠져나가 빈집이 많고 황량하기까지 했던 이곳에 최근 몇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행궁길의 '이유 있는' 변화

수원 화성행궁 앞에 자리 잡은 이곳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권리금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동네"였다. 수원 번화가였던 팔달문 인근에 있어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음식점 보리회관을 운영해온 이구림 대표는 "하루 100만~2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4년 행궁 앞 광장이 조성되면서 차량통행이 막히자 인적이 뚝 끊어졌다. 보리회관에선 매출을 10만원도 올리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권리금은커녕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아 빈집도 많아졌다.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문화유적으로 지정되면서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여 3층 이상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점도 악재였다.

이 대표와 장 사장 등 이곳 주민들은 '행궁길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구성, 수원시청 등을 상대로 집회를 열었다. 행궁길 안쪽으로 차량 통행을 허용해 달라는 요구였다. 당시 민·관 사이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 주민들의 노력 끝에 수원 행궁길엔 개성 있는 상점들이 자연스레 모여 지역을 다시 살리고 있다. 술집 크로키 내부(사진 위)와 카페 판자꾸떼./김우성 기자 raharu@chosun.com

이 흐름이 바뀐 것은 2007년, 수원의제21이라는 시민단체가 '참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란 공모사업 기획서를 들고 오면서부터였다. 이 단체 이근호 사무국장은 '행궁길 사람들'을 만나 설득했다. 외지인의 개입에 이곳 주민들은 경계했으나 매주 찾아오는 이 사무국장의 설득에 못 이겨 사업에 동의했다. 인근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윤숙 대안눈갤러리 대표 등 지역예술인도 동참,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 지역예술가로 구성된 '행궁길발전위원회'가 생겨났다.

이들의 첫 사업은 상가 간판 바꾸기였다. 개성 없고 지저분한 간판을 전통 색채를 갖춘 간판으로 바꾸는 사업이었다. 불과 4개월 만에 간판 104개가 바뀌었다. 주차장들도 새 단장됐다. 주차장을 운영하는 장 대표는 "주차장을 그럴 듯한 레스토랑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고 했다.

주민들은 평택대에 개설된 '도시대학 프로그램'도 수강했다. 그 결과로 이어진 것이 한데우물창작촌이었다. 빈 상가를 빌려 지하를 예술가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지상은 전시장으로 꾸몄다. 그리고 작년 8월 행궁동 옛 모습과 현재를 담은 '행궁 가는 길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 사진전을 열었다. 첫날 100여명이 다녀갈 정도로 성황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찾아온 주민들도 이들의 성과에 놀라워했다.

이렇게 인프라가 갖춰지자 예술인들이 하나 둘 제 발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빈집엔 화가들이 모여 작업실로 바꾸거나 특색 있는 카페를 꾸몄다. 벽면이 온통 직접 그린 크로키로 가득한 술집 '크로키'도, 주인이 시인인 '시화선' 카페도, 모두 최근 2년간 생겨났다. 회원제 찻집인 '거기다원'을 운영하는 윤미라씨는 "수원화성이 눈앞에 있고 거리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 이곳에 찻집을 차리게 됐다"고 말했다.

◆배낭여행객 위한 기획도 준비 중

현재 행궁길발전위원회는 '2009 문화예술놀이-행궁동에서 놀자'를 계획하고 있다. 나혜석생가거리미술제·한데우물거리문화축제·내마음의 보물상자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춘 이 기획은 매주 두 번씩 모이는 주민·예술인·시민단체의 합작품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적인 수원화성을 찾는 외국인 배낭여행객을 불러모으기 위한 준비도 한창이다. 이 사무국장은 "배낭여행객들이 단순히 거쳐 가는 게 아니라 하루 묵으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곳 주민들 꿈은 부풀어 있다. 이용학 행궁길발전위원장은 "이 동네가 앞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고 했다.


 

입력 : 2009.06.05 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