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람과 이야기] 손길만 닿으면 발명품으로… '여대생 에디슨'이신영 기자 f

푸른물 2009. 6. 7. 07:25

사람과 이야기] 손길만 닿으면 발명품으로… '여대생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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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6.05 23:47 / 수정 : 2009.06.06 03:13

세계여성발명대회 금·은·동상 휩쓴 서울산업대 임지선씨
발명 제품 100개 넘어 특허출원 작품 70여개 아이디어 노트만 20권 틈만나면 철물점 들러

고글에 흰색 마스크를 쓴 여대생 임지선(여·21·서울산업대 공업디자인학과 3년)씨가 가로 30㎝·세로 50㎝·높이 6㎝짜리 아크릴 판을 사포 연마기에 댔다. '위~잉'하는 굉음과 함께 까끌까끌한 아크릴판 표면이 금세 매끄러워졌다.

5일 오후 4시 서울산업대 다비치관 1층 디자인모형실. 임씨가 방금 다듬은 아크릴판을 작업대에 올려놓고 씩 웃었다. "이번엔 제대로 된 여행용 카트를 한번 만들어 보는 거야, 앗싸!"

서울산업대 디자인모형실은 각종 공구와 합판이 꽉 찬 66㎡(20평)짜리 작업실이다. 임씨는 이 학교가 자랑하는 '대학생 발명왕'이다. 임씨는 지난 1~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여성발명대회'에서 금·은·동상을 탔다. 최고상인 그랑프리(1명)와 우수상(2명)이 있지만, 그 다음 큰 상 세 개를 모두 탄 사람은 임씨뿐이다. 이 대회는 총 35개국에서 300여명의 여성 발명인과 기업인이 출품한, 세계 최대 규모의 여성 발명대회다.

임씨의 출품작은 모두 "생활 속의 불편함에 화가 나서 착안한 작품들"이다. 금상을 차지한 '종이컵 인출기'는 학교 정수기의 일회용 종이컵이 3~4개씩 겹쳐 나오는 걸 보고, 종이컵이 1개씩만 나오도록 개선했다.

은상은 임씨가 미술 실기 시험을 치르던 중 책상에 부착된 이젤이 부러지는 바람에 시험을 망친 뒤에 만든 일명 '이젤 책상'이다. 이젤을 책상에 탈·부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동상은 좌식 의자에 바퀴를 달아 손바닥으로 마루를 밀며 전진할 수 있게 만든 제품이다. 이 의자 밑에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거치대를 달아서 다리를 죽 펴고 앉은 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했다. 임씨가 "우리 할머니를 위해 만든 작품"이라며 "일상용품이 불편하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내 손으로 '업그레이드 버전'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4일 저녁 디자인을 전공한‘여대생 발명왕’임지선씨가 자신의 발명품들 사이에서 웃고 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임씨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70여 회의 발명대회에 참가해 50여 회 수상했다. 러시아, 폴란드 등 해외 대회도 포함된 성과다. 중1 때 집에서 컴퓨터로 숙제를 하다 불편을 느낀 것이 맨 처음 계기였다. 당시 그는 담임교사에게 "선생님, 모니터에 거치대를 만들어 문서를 꽂아 놓으면 편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담임교사는 깜짝 놀라 "아이디어 기획서로 만들어 특허 출원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임씨의 '발명 청춘'은 그렇게 시작됐다.

임씨는 지금껏 100여 개의 발명품을 만들었다. 그중 70개의 발명품을 특허 출원해, 12개의 특허를 땄다.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치면서 '센스 있는 디자인'까지 곁들였다.

코엑스에서 열린 이번 '세계여성발명대회'를 참관한 30여 개의 기업체에서 "이젤 책상을 당장 주문하고 싶다"며 연락처를 남겼다. '좌식 의자'를 본 60대 어르신들이 "나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임씨에게 청소기 모델 설계를 맡긴 청소기 제조업체 사장 최병채(54)씨는 "대학생에게 일을 맡겨보긴 처음이지만, 임씨의 포트폴리오를 살펴보고 프로 못지않게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임씨는 중1 때부터 각종 철물점, 동대문 시장, 학원가를 돌아다니며 책상, 발명품 자재를 공짜로 달라고 했다. 그때마다 그곳 어른들에게 "뭐 하러? 도대체 정체가 뭐야? 못 줘"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요즘은 노하우가 생겨서 재활용 센터를 돌며 발명 재료를 걷어온다.

임씨의 어머니 박은영(48)씨는 "딸이 뭔가에 '필(feel)'이 꽂히면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했다"며 "딸이 '철물점에 가서 공구를 사다 달라'고 졸라서 할 수 없이 영등포 시장, 청계천 시장을 돌곤 했다"고 말했다.

발명은 사실 임씨의 '집안 내력'이다. 아버지 임재진(49·개인사업)씨는 7개의 특허증을 보유하고 있다. 딸인 임씨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쉴새 없이 노트에 적는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20권째다. 이 노트를 바탕으로 가족들과 '발명 회의'를 진행한다. 아버지가 '기술 고문'이고, 어머니는 '소비자 고문'이다.

지금 만들고 있는 여행용 카트는 작년 겨울 일본 여행길에 착상했다. 당시 임씨는 인천공항에서 승객들이 사용하는 카트를 보고, 누구나 좀더 쉽게 짐을 싣고 내릴 수 있는 카트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인천공항에서 하루 온종일 카트에 짐을 싣고 내리는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임씨는 "앞으로 2주쯤 잠 안 자고 확실하게 연구해서 '차세대 카트'를 만들어 특허를 내 볼 생각"이라고 했다.

임씨 가족은 10여 년 전부터 틈날 때마다 '발명 회의'를 한다. 최근 임씨는 아버지에게 "지하철 문과 승강장 사이의 틈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폭 20㎝ 정도의 보조 지지대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아버지는 한술 더 떠 "승객이 내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센서를 달자"고 했다. 어머니는 "나도 몇 번인가 그 틈새에 발이 빠질 뻔했다"며 "꼭 만들어보라"고 임씨의 투지를 북돋웠다.

조정한(37) 특허청 심사관은 "10여 년간 특허심사를 해왔지만 이런 학생은 처음"이라며 "특허를 1개 받기도 어려운데 12개를 받았다는 점에서 '아이디어 뱅크'이고,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순수한 열정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임씨는 "어려서부터 나는 모두들 똑같이 겪으면서도 '원래 이런가 보다' 하고 흘려버리는 사소한 불편에 대해 '나만은 어떤 해법을 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발명을 통해 거금을 벌고 싶다기보다는, 내 주변의 사소한 불편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보람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