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람과 이야기] 일도 육아도 집에서 척척 '수퍼맘'의 유쾌한 24시(時)

푸른물 2009. 6. 7. 07:29

사람과 이야기] 일도 육아도 집에서 척척 '수퍼맘'의 유쾌한 24시(時)

공무원 '육아 재택근무 1호' 동대문구청 김명화씨 첫날
새벽 업무보고로 시작 남편 출근뒤 오전 업무
짬내 아이와 병원도 가고 상사와 전화 협의 2차례
잔무 끝내자 어느새 자정
서울 동대문구청 직원 김명화(여·34·문화관광과)씨는 지난 1일 10개월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했다. 복직 첫날인 이날 아침 김씨는 출근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대신 자택 거실에 놓인 컴퓨터 전원을 켰다.

동대문구청은 이날부터 미취학 자녀를 둔 여성 공무원 가운데 희망자 6명을 뽑아 '육아 재택근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이다. 김씨도 그중 한명이다.

재택근무 대상자들은 매일 아침 그날 할 일을 적은 보고서를 상사에게 이메일로 보낸다. 8시간 동안 집에서 업무를 보고 매주 한 차례 구청에 들러 회의에 참석한다. 업무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이지만 각자의 사정에 맞춰 융통성 있게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매달 급여의 일부(50만원)만 지급되는 육아휴직과 달리 재택근무는 본봉을 다 받을 수 있다.

이날 아침 5시에 눈을 뜬 김씨는 세수를 한 뒤 거실 컴퓨터에 보안용 USB(휴대용 저장장치)를 꽂았다. 구청에서 개인 정보 유출 등을 막기 위해 나눠준 장치다. 김씨는 오전 6시쯤 상사에게 보낼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날 김씨가 맡은 임무는 관내 공립도서관·공연장과 구청 내 다른 부서에서 진행 중인 문화사업 현황을 파악해 시청에 보고하고, 각 기관과 부서에 '우수한 사업은 예산을 추가로 지원받을 수 있다'고 안내하는 일이었다.

김씨가 이런 내용을 다섯줄쯤 썼을 때 안방에 재워놓은 생후 9개월짜리 아들이 칭얼거렸다. 김씨는 아기를 품에 안고 토닥거린 다음 다시 자리로 돌아와 보고서를 마저 작성했다.

오전 7시쯤 남편 고용승(36·회사원)씨가 일어났다. 김씨는 전날 끓여놓은 김치찌개에 김이 모락모락 솟는 흰 밥을 차려서 남편, 시어머니 장일심(69)씨와 함께 먹었다.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 남편이 오전 7시30분쯤 집을 나섰다. 아기를 안고 배웅한 김씨는 곧장 컴퓨터로 돌아와 오전 9시까지 업무를 본 다음 오랜만에 일하느라 뻐근해진 어깨를 쭉 펴고 청소를 시작했다.

"원래 이 시간이면 구청에서 팀별로 회의를 하거나 막 업무를 시작할 때예요. 아침 일찍 오전 업무를 마치고 집안 청소를 하려니까 어색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네요."

▲ 지난 1일 전국의 공무원 중 처음으로‘육아 재택근무’를 시작한 김명화(여·34·동대문구청)씨가 경기도 하남의 자택 거실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낮 12시가 되자 김씨는 감기 기운이 있는 아들을 데리고 근처 소아과병원에 갔다. 낮 12시50분쯤 집에 돌아온 김씨는 후다닥 점심을 먹은 뒤 아기에게 젖을 물려 재웠다.

김씨는 오후 4시까지 분주하게 일했다. 청량리2동에 있는 구립 정보화도서관에 전화해 문화사업 관련 자료를 받고 예산을 뽑았다. 결과는 바로 구청 전산망에 올렸다. 구청에 있는 상사가 김씨의 보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두 차례 전화를 걸어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급한 일을 마친 김씨는 오후 4시부터 3시간 동안 아기를 봤다. 시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자꾸 엄마를 찾으며 칭얼대서다. 김씨는 "서른셋에 낳은 아이라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했다. 김씨는 저녁을 먹고 아기를 재운 뒤 밤 9시부터 12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낮에 다 못한 업무를 마저 했다.

김씨는 "재택근무제도가 안 생겼으면 아기를 근처 놀이방에 맡길 생각이었다"며 "한달에 50만~60만원씩 들어갈 보육비가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출근한 사이 나 혼자 온종일 애를 보려면 온몸이 쑤실 텐데, 며느리와 번갈아 보니 살 만하다"고 했다.

동대문구청 관계자는 "여성 공무원들이 출산 후 육아휴직(1년)을 2~3회씩 연장하는 경우가 잦아 그 해결책으로 재택근무제를 도입했다"고 했다. 현행법은 최대 3년간의 육아휴직을 보장하고 있지만 당사자는 수입이 없어 아쉽고 구청은 업무 공백이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급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물론 구청 내부에서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직원이 집에서 노는지, 일하는지 어떻게 감시하느냐"는 것이다. "집에서 일하다가 개인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방태원 동대문구청장 직무대행은 그때마다 "체계적인 업무 시스템만 갖춘다면 직원들의 충성심이 증가해 오히려 업무 효율이 올라갈 것으로 본다"고 답변했다. 자체 보안시스템도 개발했다.

육아 재택근무를 신청한 여성 공무원은 김씨 외에도 5명이 더 있다. 어린 첫째를 키우며 둘째·셋째를 낳은 엄마들이 많다. 임신 4개월째인 홍유정(여·35·의약과)씨는 "큰애가 아직 17개월밖에 안 됐는데 둘째가 생겨서 사무실에 나가기가 너무 고단했다"며 "일하면서 두 아이도 내 손으로 키울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올 초 넷째를 낳은 김미정(여·41·공원녹지과)씨는 "첫째를 낳은 뒤에는 출산휴가를 쓰고 1년간 육아휴직을 했는데, 둘째·셋째를 낳을 때는 동료들 보기 미안해서 출산휴가만 썼다"며 "넷째를 가진 뒤 고민이 많았는데 재택근무로 마음의 짐을 덜었다"고 했다.

동대문구청은 오는 10월부터 재택근무 대상자를 장애인 공무원, 직계 가족 가운데 간병이 필요한 중환자가 있는 공무원 등으로 넓힐 계획이다. 성균관대 사회복지원장인 김통원(52) 교수는 "우리나라 기업과 관공서에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 조선일보
윤주헌 기자 calling@chosun.com
입력 : 2009.06.05 02:38 / 수정 : 2009.06.05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