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사자 유해발굴만 10년째… '만년 중령' 이용석
"내가 귀신도 아닌데 땅 밑을 어떻게 아나" 매번 압박감 시달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발굴현장 못 찍게하자 북(北)의용군에 내 이름 넣어
"전사자 실종신고 13만명 3367구 찾아냈지만 신원확인은 114명 뿐"
"두개골에 북한군 TT권총 탄환이 박혀 있었어요. 확인사살을 했던 것 같아요. 만년필, 호루라기, 삼각자 등 유품이 나왔습니다. 삼각자에는 '崔承甲(최승갑)'이라고 적혀 있어요. 유족인 할머니를 업어 '다부동 369고지' 발굴 현장으로 모셔왔습니다. 할머니는 호루라기를 보는 순간 '우리 남편이 맞다'며 쓰러졌어요. 전쟁이 나기 바로 일주일 전 휴가를 나온 남편이 이 호루라기를 차고 있었다는 겁니다."―썩지 않는 유품(遺品)이 60년이 지난 전사자의 신원을 알려줬군요.
"강화도 철산리에서 '군번 없는' 유격대원 유해를 발굴한 적이 있었지요. 가수 진미령씨의 부친 김동석(올 초 작고)옹이 지휘했던 부대입니다. 작업 과정에서 유골과 함께 호리병이 나왔습니다. 6·25 전사자의 것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었죠. 그런데 당시 전우였던 분이 호리병을 들고 '바로 이것이 증거다'라며 통곡했습니다. 사세가 급박해 대충 묻고 술병을 넣어줬다는 거지요. 이분은 그 호리병의 마개를 연 뒤 벌컥 마셨어요. 저는 기겁했습니다. 큰일 났다 싶어, 저는 조금 맛을 봤어요. 술 성분은 이미 다 날아가고 그냥 물이었습니다."
- ▲ 이용석 발굴과장은 “유해발굴 작업의 가장 큰 장애물은 시간”이라며 “세월이 흐를수록 불리하다”고 말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51년 2월 여기서 중공군에 포위돼 단 이틀 만에 한국군 7800명, 미군 2200명이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싸운 우리 8사단은 해체될 정도였지요. 그 뒤 대구로 내려가서 사단 재편성 신고를 했습니다. 여기 나온 전투화 고리와 버클, 4열 단추 등 유품을 보세요. 누비옷 차림의 중공군 단추는 둥그렇게 별표 모양입니다."
그는 유해발굴 지역을 선정하고 현장을 통제한다. 유해발굴이 시작된 2000년부터 현장에 나와 아직도 그 현장에 있다. 일주일 중 닷새를 현장에서 지내고 금요일 저녁에 귀가하는 생활의 연속이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그가 등장한다. 장동건이 북한의용군으로 간 동네 청년을 쏴 죽이는데, 하필 그 청년의 이름이 '이용석'이다.
"강제규 감독측에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발굴 현장을 찍겠다고 했어요. 저는 '대본을 본 뒤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영화가 자칫 선배 군인들의 명예를 더럽힐지 모르니까요. 대본은 못 보여준다, 그러면 현장을 찍을 수 없다는 식으로 승강이가 벌어졌습니다. 상부에서 전화도 걸려와, '카메라를 끄고 현장을 보는'선에서 타협했어요. 그쪽에서는 결국 세트장을 만들어 촬영했습니다. 나한테 감정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 '편향된' 영화를 보고 실망했지요."
―처음 어떻게 해서 유해발굴 사업에 뽑히게 됐지요?
"99년 9월 전방에서 대대장을 마치고 국방부 인사참모부에 발령받고 신고했어요. 사흘 뒤 짐을 싸들고 내려오니 발령이 바뀌었어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을 해야 하니, 육군본부 내 유해발굴통제장교를 맡으라는 겁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컸지요. 하지만 군은 명령대로 가는 것이니까요."
그는 3사 출신이다. 그 뒤로 진급을 못한 채 이 보직에 머물면서 유해 발굴의 산 증인이 된 것이다. '만년 중령'으로 내년이면 계급 정년으로 예편한다. 그는 "돌아보면 진급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을 얻었다"고 했다.
"당초 직책을 맡고 나니까, 상부에서는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무슨 유해가 있겠나. 쓸데없이 문제를 야기시키지 말고 다른 업무나 해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단순했습니다. 만약에 유해가 나오면 국민이나 유가족들이 '지금까지 뭘 하고 버려뒀느냐'며 소요사태를 일으킬 것으로 알았어요. 처음 국방부에 보고하는 문서에 '혹 6·25 유해가 발굴돼 공개돼도 사회적인 문제만 낳을 수 있으니 기념사업 중 유해발굴은 빼달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런데 시작도 못해 볼 발굴사업이 어떻게 여전히 진행되고 있나요?
"참전용사들이 열성적이었습니다. 전쟁통에 수습하지 못한 유해가 널려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들 중에는 '만약 유해를 못 찾는다면 내가 죽어서라도 뼈를 뿌려놓겠다'고 했어요.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새로 부임한 직속상관도 '기념사업 100가지 중 유해발굴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국방부에 발굴 사업을 하겠다고 보고를 한 뒤 '왜 오락가락하느냐'는 핀잔을 들었지요."
―그때 유해 발굴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알고는 있었나요?
"처음에는 '유해'라는 말도 잘 몰랐습니다. 보고시한은 다가오고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하나…. 무턱대고 어느 고고학자에게 자문하니 '우리가 장의사인 줄 아느냐'며 전화를 끊기도 했습니다. 정말 장의사를 찾아가 유해 수습을, 문화재 연구원에게는 발굴기법을 배웠습니다. 아무 데나 땅을 파서 될 일도 아니고. 발굴지역을 찾기 위해 눈보라 속에서 아이젠을 차고 강원도 양구의 백석산을 오르기도 했지요."
그는 '6·25 50주년 기념일' 전에 첫 삽을 떠야 하는 압박감에 쫓기고 있었다. 첫 발굴지는 낙동강 방어선 위쪽이었던 다부동 전투(경북 왜관 근방) 지역을 정했다. 참전용사들이 "16회나 백병전이 있었다"고 증언한 곳이었다.
2000년 4월 3일 개토제(開土祭)를 하고 발굴에 들어갔다. 동물 뼈인지 사람 뼈인지를 식별해주는 충북대 박선주 교수(체질인류학) 등 발굴팀은 8명이었다.
"위에서 '파서 안 나오면 어떻게 할 건가' 했을 때, '내가 귀신도 아니고 땅밑을 어떻게 아나'라며 압박감에 시달렸지요. 그런데 갈퀴로 낙엽을 긁어냈는데 파열된 유해 4구나 나왔어요. 대한경찰, 여주농고 학도병 배지, 인민군 모자, 수류탄과 박격포탄 파편 등과 함께. 유골의 등뼈 속에는 개미떼가 집 짓고 하얀 알을 까놓았어요.
저는 술을 잘 못 마시지만 당시에는 일과가 끝나면 발굴팀과 술을 마시며 항변했어요. '전쟁의 비참함이 50년이나 방치됐나. 죽음으로 나라를 지켰고 죽어서는 또 이렇게 고통을 겪다니. 시점을 바꾸면 내가 죽은 것이고, 내가 내 무덤을 파는 것인데…'라고."
그는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국방부와 전쟁기념관에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너무 설친다고 비웃는 이도 있었고, 사진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다.
"서울시장과 구청장들 간의 모임이 있는 세종문화회관에도 찾아갔습니다. 충남 계룡대에서 가로세로 2m40×1m20 합판을 트럭에 싣고 올라갔지요. 회관 로비에 펼쳐놓고, 회의가 끝나면 봐주겠지 했지요. 그런데 시장은 '점심시간이 됐다'며 그냥 가버리는 겁니다. 눈물 흘리며 되돌아왔습니다. 다음해 또 갔습니다. 이번엔 바뀐 시장이었는데, 몇 가지 질문까지 하면서 관심을 표시했어요. 돌아오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잠깐 만나도 알 수 있는 그의 격정적인 성격으로 보면 그가 정말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또 신명이 나 환호성을 질렀을 것 같았다.
- ▲ 강원도 횡성의 발굴 현장./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어느 육신이라도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화려한 장례를 치르든 가매장이든 버려졌든 그 끝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묻혀 있는 전사자 유해를 찾아야 합니까?
"유해 발굴은 한마디로 국가가 전사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진 빚을 갚는 과정입니다. 국가를 위해 싸워 죽은 분들을 챙기지 않으면 어느 누가 그 국가를 위해 충성하겠습니까. 2007년 6월 5일 경기도 포천의 '38검문소' 근처에서 발굴할 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저는 현장책임자로 경례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속에서 북받치는 것이 있어, 대통령의 손을 잡고 '한 말씀만 올리겠다'고 했어요. '제가 노인들을 만나보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누구도 찾아와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외로움입니다. 전사자 유해는 50년 동안 이렇게 방치돼 있는데,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습니다. 이 현장에 대통령이 오신 것은 처음입니다.' 노 대통령은 떠나면서 '너무 늦었지만 많이 발굴해달라'고 했습니다."
―발굴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요?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국토 개발로 지형은 많이 바뀌었고, 전사자의 매장 장소를 아는 세대는 너무 늙었거나 돌아가셨어요."
―현장에서 들으니 100곳을 파서 1구를 찾는 정도라고 했는데, 발굴 방식이 비효율적 아닌가요?
"행여 시신을 훼손할까 손삽으로 파고 붓으로 털어냅니다. 통상 유해는 깊이 30㎝ 이상 묻혀 있지 않습니다. 지뢰탐지기뿐만 아니라 과학 장비를 써도 별로 효과가 없어요. 흙 속에 돌과 나무뿌리, 유해가 있다면 장비로서는 식별이 안 됩니다. 결국은 전사(戰史)와 실제 지형, 제보자의 증언이 중요합니다."
발굴 사업은 당초 2003년 7월 27일(휴전 날짜)까지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 팀원들은 원대 복귀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이미 남은 군 생활을 유해 발굴에 모든 걸 걸고 있었다.
"저는 다니면서 '미국은 지구 끝까지 찾아가는 마당에 우리는 국토 안에서도 못하는가'라고 역설했습니다. '혼자 잘난 척하지 마라'는 말도 들었지요. 상부에 보고서를 올려 '발굴작업이 영구적으로 이뤄지려면 독립부대로 가야 한다. 미국은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 안에 '포로, 실종자 탐색 발굴부대(JPAC)'를 운영해 400여명의 전문 인력이 전쟁 중 숨진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고 했지요. 발굴 사진을 들고 국무조정실로 가서 '나 혼자 힘으로는 부치니 도와달라'고도 했습니다. 결국 이뤄졌습니다. 내가 결정권자는 아니지만 내가 동기를 제공했다는 보람은 있어요."
이제 결론에 도달할 때가 됐다.
―그런데 유가족에게 유해를 얼마나 찾아줬습니까?
"유족으로부터 6·25 전사자 실종 신고를 받은 것은 13만명입니다. 휴전선 이북에 4만, 휴전선 일대 2만, 남쪽에 6만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해 발굴 첫해 344구를, 지금까지 3367구를 찾았지요. 하지만 신원이 확인된 경우는 114구밖에 안 됩니다. 유가족의 DNA 검사용 혈액표본은 아직 6701개밖에 안 돼 있습니다. 군번줄과 도장으로 20여구의 신원이 확인됐고, 수통이나 숟가락에 이름을 새긴 이도 드물게 있습니다. 이렇게 찾은 것도 유족에게 확인된 경우는 46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허튼짓을 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끝까지 찾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