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수도권Ⅰ] [라이프 인 경기] 37년만에 시인된 배학기씨

푸른물 2009. 6. 7. 07:07

수도권Ⅰ] [라이프 인 경기] 37년만에 시인된 배학기씨

 "가난·그리움을 글로 옮기면 詩"


발행일 : 2009.05.27 / 수도권1 A24 면 기고자 : 양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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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에는 지난 23일 '그리운 연석산(硯石山)'이란 제목의 높이 2.5m, 폭 2.3m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그리운 연석산'은 고향을 떠나는 아이가 산 너머에 있는 어머니와 마을을 그리는 내용의 시다. 시를 쓴 작가는 배학기(49)씨다. 배씨는 어린시절 고향을 떠나오면서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시에 담아 시를 쓴 지 37년 만에 2008년 '아시아 서석문학' 창간호에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고향 사람들은 배씨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은 나머지 돈을 모아 마을 입구에 시비를 세웠다.

25일 오후 3시, 시흥시 정왕동 한 가구점 안. 반팔셔츠 차림의 배씨가 열심히 주문전화를 받고 있었다. 배씨는 벌써 13년째 이곳에서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다. 낮에는 가구점을 운영하고 밤에는 시(詩)를 공부하며 배씨는 어릴적부터 꿈꾸던 시인이 됐다.

가난함이 곧 詩

배학기씨는 1960년 전북 완주군 동상면 농촌마을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배씨의 부모는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집은 늘 어려웠다. 배씨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가을 무렵 배씨의 부모는 아들을 외삼촌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해 흉년이 심하게 들어 자식들 모두에게 밥을 먹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배씨는 12세 어린 나이에 혼자 50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 충남 논산에 있는 외삼촌집으로 향했다. 집을 떠나오는 길에 멀어져가는 고향의 '연석산'을 바라보며 지은 시가 '그리운 연석산'이 됐다.

배씨는 "검은 고무신 신고 배고픔을 참으며 길을 재촉하는데 산너머에 있을 가족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며 "결국 가난과 그리움을 글자로 옮기니 시가 되었다"고 했다. 길에 있던 동물들과 싸리꽃, 하늘의 구름이 모두 그대로 시가 되었다. 배씨는 "그때부터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이름 없는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다시 전북 익산 이모댁으로 온 배씨는 익산 원광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배씨는 "틈틈이 계속 시를 썼지만 가난 때문에 정식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며 "가난과 고통이 오히려 시를 쓰는 힘이 돼 주었다"고 했다. 배씨는 또 "시인은 술도 70%, 밥도 70%라고 했다"며 "뭐든 비워야 시상이 떠오른다"고 했다.

학원 선생님과 가구점 사장님

배씨는 1980년대 초반 전북 익산시 마동 '신설지마을'이란 420가구가 사는 판자촌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동국주산'이란 보습학원을 열었다. 마을에서 부모가 돌보지 못해 공동화장실에 빠져 목숨이 위태로웠던 4세짜리 아이를 구하고 난 뒤 결심한 일이었다. 가난한 마을에 학원을 열겠다고 하자 사업등록을 해주던 담당 공무원은 "거기서 학원 열면 굶어죽는다"며 말렸다. 배씨는 돈이 없어 인근 초등학교에서 오래돼 버리는 나무책상과 의자를 직접 톱과 망치를 가지고 고치고 색을 칠해 학원을 꾸몄다.

그렇게 시작한 학원에서 마을 아이들 120여명이 공부를 했다. 66㎡(약 20평) 정도 넓이의 교실은 늘 학생들로 가득했다. 한달에 6000원 하던 학원비는 절반 정도 아이들만 냈고 형편이 힘든 나머지 학생들에겐 받지 않았다.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한달에 2번씩 팥죽을 끊여 마을에 돌리기도 했다. 10년 동안 학원을 운영하면서 4세부터 중학생까지 수백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러나 판자촌이 철거되고 아파트가 들어서자 학원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었고 배씨는 학원을 접어야 했다. 그 후 새롭게 시작하게 된 일이 바로 가구점이다. 배씨는 "가구는 가정을 화목하게 해주고 단정하게 해주는 물건"이라며 "가구점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로 가구점을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1995년 잠시 호주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지만 한국이 그리워 3개월 만에 돌아왔다. 호주를 오가던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이던 시흥땅이 마음에 들어 13년 전 시흥에 정착했다. 배씨는 "가구를 사는 고객들은 물건에 티끌만 있어도 바꿔달라고 한다"며 "고객들이 까다롭게 하면 그 마음을 헤어리는 것도 모두 시를 쓰는 데 가르침이 된다"고 했다. 올해 스물일곱과 스물다섯인 두 아들은 전자공학과 치의예를 전공했다. 시인의 아들이 모두 이공계인 것이 의외라고 하자 배씨는 "아이들이 어릴 때 아버지가 주산학원을 하다보니 매일 본 게 산수문제라 그런가 보다"며 웃었다. 배씨는 "시 한소절을 쓰는 데 6개월~1년이 걸리기도 한다"며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시를 계속 쓰고 싶다"고 했다. 시인으로서의 꿈을 묻자 배씨는 "죽기 전에 시집 1권 남기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기고자 : 양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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