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14> “왕자의 형벌도 서민처럼”

푸른물 2009. 6. 7. 06:54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14> “왕자의 형벌도 서민처럼”

손자 구명 안 한 주더의 아내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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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주더(왼쪽 안경 쓴 사람)가 펑더화이와 장기를 두고 있다. 오른쪽 뒤에서 덩샤오핑이 관전하고 있다. 덩의 앞에 엉거주춤하게 선 소년은 주더의 손자 중 한 명. 김명호 제공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은 모든 분야에 변화를 초래했다. 범죄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흔치 않았던 강도·살인·절도·총기 탈취 등 강력범죄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도시가 심했다. 상하이에서는 불량배들이 백주에 경찰들을 습격하고 부녀자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고 베이징역 자폭 사건은 사상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공공장소마다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사람투성이였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당장 합세할 표정들이었다.

수많은 비밀결사와 범죄집단의 명멸을 들으며 성장한 나라의 국민이다 보니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문혁을 거치며 폭력의 짜릿함을 맛본 경험들도 있었다. 흉악한 사람들은 법을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선량한 서민들은 이들을 두려워했다.

83년 5월 5일에는 선양을 출발한 중국민항 296기가 6명의 납치범에 의해 한국 춘천공항에 불시착했다. 탈취범들은 공산당 랴오닝성(省) 위원회 소속의 승용차를 타고 비행장까지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네이멍구(內蒙古)에서도 청년 8명이 27명의 부녀자를 폭행하고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7월 17일 베이다이허에서 피서 중이던 덩샤오핑에게 공안부장이 국내 치안 상태를 보고했다. 덩은 “다수를 소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인도주의”라며 ‘옌따(嚴打)’를 지시했다. 형사범들에게 엄하고 혹독한 타격을 가한다는 것이 그 종지였다. 작은 범죄지만 장차 큰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있거나 선동에 혹해 무리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유맹(流氓)으로 분류했다. 유맹죄는 극형이었다.

깡패·건달·치한·좀도둑·강도를 비롯해 남녀관계가 복잡한 공산당원이나 공직자 등 적용 범위가 한도 끝도 없었다. 여자화장실을 넘봐도 유맹이었다. 성이 왕(王)씨였던 한 여인은 10여 명의 남자와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스스로 선택한 일종의 생활방식’이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톈진시 인민은행장 주궈화(朱國和)도 유맹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주궈화는 주더(朱德)의 친손자였다. 큰 키에 인물도 멀끔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사생활이 문란했다. 주더는 마오쩌둥과 나란히 초상화가 걸렸던 중국 홍군(紅軍)의 아버지였다.

10명의 원수 중 서열 1번이었다. 덩샤오핑의 허락이 필요했다. 덩은 집행을 비준하지 않았다. “캉커칭(康克淸)이 결정하게 해라. 모든 문건을 갖다 드려라”고 지시했다. 캉커칭은 주더의 부인이었다. 19세에 중국혁명에 뛰어들어 장정을 거친 건국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주더의 얼굴에 칼을 들이대는 행위”라며 분노한 캉이 손자를 구하기 위해 직접 톈진에 내려갔다는 소문이 나돌 때였다. “주더의 손자를 극형에 처하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캉커칭은 “왕자의 범법에 대한 형벌도 서민과 같아야 한다”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캉커칭의 급선무는 며느리에게 상황을 정확히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손자의 사형이 집행된 다음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회의에 참석했다. 주더는 생전에 “애들 중에 사람 구실 못 하는 놈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 덩달아 화를 내서는 절대 안 된다. 신문에 모든 관계를 청산한다고 발표해라. 당에는 당의 기율이 있고. 나라에는 국법이 있다”는 말을 캉에게 자주 했었다.

‘옌따’는 치안과 질서 확립에는 효과가 있었다.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 3년간 시행된 한시적 정책이었지만 생활 습관 때문에 희생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국민이 국법을 불신하는 계기가 됐다. 옌따 기간 중 서구에서는 인권문제를 거론했지만 중국 정부는 끄떡도 안 했다. 옌따는 96년에도 한 차례 있었다. 2000년부터 이듬해까지 실시된 ‘신세기 옌따’가 마지막 옌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