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뒷굽 / 허형만

푸른물 2014. 11. 4. 07:07

뒷굽 - 허형만(1945~)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전족을 한 중국 여인처럼 조촘조촘 걷는 친구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두 뒷굽이 똑바로 닳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걷는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의 구두 뒷굽은 새 구두처럼 양쪽이 수평으로 마모되고 있었다. 옛날 신병 훈련소에서 지급된 군화가 크거나 작더라도 발을 거기에 맞추라고 윽박지르던 생각이 나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요즘 브랜드 구두 가운데는 관절 부하를 줄이기 위해서 뒷굽 바깥쪽을 아예 비스듬히 닳아버린 각도로 제작한 것도 있다. 뒷굽의 어느 쪽이 어떻게 닳아버리든 간에, 그 모양보다는 구두의 주인이 걷기 편해야 하지 않을까.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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