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 해도 - 박철 (1960∼ )
내가 산다는 것은
오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없음을 슬퍼하지 말자
우리 영원히 헤어질 수 없음을 슬퍼하자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 해도
사랑은 쓸쓸한 등대지기의 하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죽어간다는 것
이 시는 중간중간 모순어법이 끼어듦으로써 잠시 잠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러다가 시의 결구에 가서는 결국 ‘환한 길’로 들어선다.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길 잃고 헤매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리하여 길을 발견하는 것. 고독하지 않으나 끝내 고독한 것, 만지나 끝내 만져지지 않는 것, 사소하나 끝내 사소하지 않은 것, 결코 소리치게 하지 않으나 끊임없이 소리치게 하는 것, 사랑한다 사랑한다, 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내가 죽어간다는 것’임을 알면서도. 시만이 오늘 당신 앞에 이런 걸 펼쳐줄 수 있지 않을까, 수평선처럼 소리 없이 출렁거리면서. <강은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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