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용산 시위 현장에서 숨진 김남훈(31) 경사의 아버지 김권찬(55)씨는 1일 “

푸른물 2010. 7. 2. 11:50

용산 시위 현장에서 숨진 김남훈(31) 경사의 아버지 김권찬(55)씨는 1일 “시너 뿌리고 화염병 던진 것은 너무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남훈이를 죽게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가슴 아픈 악순환의 고리는 우리 남훈이로 끝나야지요. 다시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사람들이 없게 해 주세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미워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이젠 모두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서민의 언어로 사회 통합과 화합을 얘기했다.

1일 김권찬씨는 남한산성을 찾았다. “ 이제 잊을 건 잊고, 용서할 건 용서해야지요….” 그는 “다시 이런 죽음이 없길 바랄 뿐”이라며 겨울 산을 바라봤다. [김경빈 기자]

김씨는 평범한 아버지였다. “힘이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겠다”며 손을 내젓다가도 아들 자랑이 나오면 달라졌다. 아들이 선물한 가죽지갑을 보여줄 땐 굵은 눈물을 훔쳐냈다. 지난달 27일부터 1일까지 김씨와의 다섯 차례 인터뷰를 정리한 일문일답.

-아들이 숨진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자식 장례식 치르고 나니 바로 설이 왔어요. 연휴 내내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지요. 애가 죽었다는 생각도 안 나요. 설 다음날에 아들 특공대 동료들이 세배한다고 찾아왔어요. 그때 ‘아, 죽었구나’ 싶습디다. 하나하나 우리 아들처럼 생겨서…. 앉아 있기 힘들어 그냥 뛰쳐나왔어요.”

-용산 시위를 어떻게 보십니까.

“나도 없이 살아온 사람이니까 동정이 갑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개발을 하면 건물 주인에겐 좋겠지요. 하지만 세 살던 사람은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보상금으로 어디 나가서 월세도 못 얻는데 나가란다고 나갈 수 있겠어요. 나 같아도 못 나가지요. 그러니 시위에 나섰겠지요. 방법이 잘못됐지만요.”(※그는 스스로를 ‘없는 사람’으로 불렀다. 무허가 주택에서 15년째 살고 있다. 재건축을 해 27평(89㎡) 아파트에 사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재건축을 기다리다 못해 재건축조합 총무도 맡았다.)

-농성자들을 이해한다는 말인가요.

“시너나 화염병을 이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장례식장에서 아들 잃고 앉아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한 명 잃었는데, 저쪽에선 다섯 명이나 죽었구나’ 하고. 우리 아들이나 그분들이나 세상을 떠나고 나면 남은 가족들 심정은 다 똑같지 않겠소. (이를 꽉 깨물며) 하지만 우리 아들은 그분들보다 어린데, 얼마 못 살다 죽어서….”

-시위대가 원망스럽진 않습니까.

“죄가 밉지요. 그렇게 과격한 시위를 한 것은 너무 잘못됐지요. 아무리 화가 난다고 그러면 안 되지요. 하지만 그 사람들을 미워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죽은 사람들 생각하면 가엾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저는 용서할 수 있어요. 이젠 모두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때입니다. 그쪽 죽은 분들도 장례식을 치렀으면 좋겠어요. 정부가 세입자들이 뭘 원하는지 잘 들어보고, 들어줄 수 있는 만큼 들어줘서 장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

-전국철거민연합이 나서서 사태가 커졌다는 시각도 있는데요.

“그 점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과격 시위를 주도하는데 그게 철거민들에게 도움이 됩니까. 결국 이렇게 전철연 분들이나 철거민 분들 모두 희생이 됐잖아요.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해서 돌아오는 게 뭔가요. 누군가 죽고 나서 보상을 받으면 뭣 하나요. 진짜 철거민을 위한다면 철거민들을 대표해 재개발업자들과 타협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우선이지요.”

-검찰이 나서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궁금했어요. 우리 아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들 죽은 다음 날 아침에 장례식장(잠실 경찰병원)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갔어요. 가판대에서 파는 신문을 죄다 들춰봤어요. 그래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어요.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그런데 문득 ‘알면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다고 내 아들이 살아 돌아오나요. 그래서 접었어요.”

-정치권에선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의 퇴진을 요구합니다.

“그가 물러난다고 이 일이 해결되나요. 또 재개발하는 곳이 생기면 마찬가지로 억울한 세입자들이 나오겠지요. 그 사람들이 또 화염병을 들고 시위하면 또 경찰은 진압을 하겠지요. 불법을 막고 질서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끝이 없습니다. 시위 전에 막아야지요. 세입자에 대한 보상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런 일이 되풀이될 겁니다.”

-그럼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세요.

“우리나라는 서민이 살기 힘든 나라예요. 정부가 없는 사람들 주려고 임대 아파트를 지어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왔다갔다 해요. 없는 사람들은 꿈도 못 꾸지요. 나도 재건축 바라고 신림동 무허가 주택에서 15년을 살았어요. 처음엔 2년만 있으면 재건축된다고 해서 들어왔는데 3년, 5년, 10년… 시간만 흘렀지요. 재건축 비용을 못 대는 주민들이 있어도 건설사는 주민들 입장을 하나하나 안 봐줍니다. 정부에서 없는 사람들 얘기도 들어주고, 중간에서 타협을 봐줘야 해요.”

-사건을 아예 잊고 싶으신가요.

“붙들고 있는다고 우리 아들이 돌아온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그렇게 하겠지요. 하지만 그건 아니잖아요. 그만 접고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지요. 잊는다기보다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길 바랍니다. 재건축과 관련해 세입자 보상 규정과 제도를 확실히 만들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죽음은 이번 일로 끝나야지요. 남훈이 같은 희생자가 다시 나와선 안 됩니다.”

-경찰이 서둘러 진압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시진 않습니까.

“경찰도 탓하고 싶지 않아요. 설마 우리 아들 죽으라고 거기 밀어넣었겠습니까. 길거리에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질서 유지를 하는 게 경찰의 일이니까요. 이번 사건이 강제 진압에서 비롯된 것처럼 쓴 신문이 많은데, 그건 잘못이라고 봅니다. 본질은 세입자들에 대한 보상 제도가 미비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지요. 그리고 그 갈등을 물리적인 시위로 해소하려던 것이 문제였지요.”

-아드님의 죽음이 헛되이 비춰질까 하는 걱정은 없습니까.

“뭘 위해 죽든 죽으면 끝이지요. 다만 죽은 우리 아들을 나쁜 편으로 갈라버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아들은 임무 수행을 한 것 말고 죄가 없어요. 우리 집 보셨겠지만 경찰도 서민입니다. 경찰을 서민의 적으로 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퀭한 눈에 힘을 주고 이를 꽉 물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김씨는 첫 인터뷰에선 거의 말을 안 했고, 사진 찍는 것도 거부했었다.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땐 “왜 자꾸 찾아오느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30일 그를 네 번째로 만났을 땐 “기사를 잘 써서 다시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사람들 없게 해 주세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글=임미진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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