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
2008-12-23 12:54:47 | 추천 : 2 | 조회 : 28 |
K씨는 의사다. 간암 말기 환자였던 아버지는 몇 년 전 그가 근무하던 종합병원에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치료될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그는 치료를 끝까지 받게 했다. 당시엔 그게 의사인 아들의 도리라고 여겼다. 혹독한 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던 아버지는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금 그는 후회한다고 했다. “과연 그것이 최선이었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며 씁쓸해했다.
K씨가 유별난 경우였을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서울대 의대의 모 교수는 한 워크숍에서 환자의 ‘의사 아들들’이 말기 암환자인 아버지를 중환자실에 입원시킨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고통스럽지 않게 차라리 호스피스 치료를 받게 해드렸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이게 다 잘못된 ‘효도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학 지식을 꿰고 있는 의사들이 이럴진대 일반인들은 어떨까. 말기 암이나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환자의 가족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에 대해 무지하고 속수무책인 채로 수술과 치료를 고집했다가 당황스러운 이별을 겪곤 한다. 환자가 부모인 경우 치료가 의미 없다고 하더라도 가족끼리 논의가 벌어지면 “마지막까지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목소리가 이긴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최근 나온 삼성서울병원 의사들의 설문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삼성서울병원이 지난달 20일부터 12일간 소속 의사 455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의사들의 86.4%가 연명 치료 중단, 즉 존엄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반인들의 존엄사 찬성 비율보다 높은 수치다. ‘연명 치료 중단 결정은 누가 내려야 하는가’라는 질문(복수응답)에는 ‘환자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는 응답이 62.8%, ‘의사의 의학적 판단’으로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59.2%였다.
세브란스병원은 지난달 이뤄진 법원의 첫 존엄사 인정 판결에 대해 2심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법원에서 판결받는 ‘비약적 상고’를 하기로 17일 결정했다. 대법원의 최종적 판단을 구하되 환자와 보호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다. 병원의 이 같은 결정이 사실 놀라울 건 없다. 상고하지 않고 호흡기를 떼었을 경우 병원이 떠안게 될 사회·윤리적 부담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다. 존엄사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인식과 여론의 형성에 그동안 의료계가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해온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무엇보다 의사들은 환자 가족들에게 환자가 겪을 수 있는 고통과 치료 가능성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줘야 한다. 필요하다면 말기 환자의 연명 치료 중단 문제에 대해 보다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몇 달 전 암 환자였던 어머니를 여읜 한 선배는 “의사들이 ‘치료’라고 말할 때 그것이 건강 회복이 아니라 ‘연명’을 의미하는 것인 줄 나중에야 알았다”며 허탈해했다. 주변에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다. 사랑하는 가족을 고통 속에 떠나 보낸 이들은 상황을 돌이킬 수 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의술은 발전하고 있다. 그만큼 첨단 기계장치에 의존한 연명 치료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껏 ‘효도’와 ‘불효’ 사이에서 눈치 보면서도 정작 환자가 당할 고통이나 품위 있게 죽을 권리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자가 가족과 남아 있는 생을 편안하고 품위 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사들이다.
존엄사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은 이제 시작이다. 생전 유언의 필요성과 호스피스 제도 정착을 위한 논의도 이번 기회에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은주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중앙일보 12월 18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