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 학교서 '師弟교사' 4대째 릴레이김형원 기자 won@chosun.com 기자의 다

푸른물 2010. 5. 16. 08:22

한 학교서 '師弟교사' 4대째 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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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5.14 02:59 / 수정 : 2010.05.14 05:11

서울 배화여고 이색 기록
4명 모두 모교서 교편 "학생지도법·개인 고민 자매처럼 나누며 살죠"

1980년 3월 서울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고 프랑스어 담당 곽성희(당시 24세) 교사가 1학년 학생들에게 쪽지시험을 냈다. 딱 한 학생이 만점을 받았다. 곽 교사가 "이걸 어떻게 다 맞혔지? 대단하네"라고 하자 단발머리에 내성적이던 학생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 학생은 7년 뒤 프랑스어 교사가 되기 위해 학교에 다시 찾아왔다. 심사위원인 곽 교사를 앞에 두고 프랑스어 공개수업을 했다. "심장이 멎을 뻔했다"고 당시를 기억하는 그 학생은 배화여고에서 24년째 프랑스어와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노남희(47) 교사다.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둔 13일 오후 배화여고에서 노 교사가 자기 담임 선생님이었던 곽 교사와 자매처럼 수다를 떨었다. 곽 교사가 "그때 너 진짜 얌전했는데"라고 말하자 노 교사는 "원래 선생님 앞에서는 다 내숭떨고 그런 거잖아요"라며 웃었다.

반 학생들에게 책읽기를 많이 가르친 노 교사의 제자도 이 학교 교사가 됐다. 국어를 가르치며 독서지도를 맡았던 이효정(40) 교사다. 이 교사 앞에서 딱 부러지게 발표를 잘했던 제자도 또 이 학교 교사가 됐다. 2008년 공개수업 테스트를 거쳐 국어 담당으로 부임한 공주희(25) 교사다.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둔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고 교정에서 4대에 걸친 사제(師弟)지간 교사들이 다정히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다. 왼쪽부터 공주희(25) 교사, 곽성희(54) 교사, 이효정(40) 교사, 노남희(47) 교사.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곽성희·노남희·이효정·공주희 교사까지 사제(師弟)의 인연이 4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학교나 다른 학교에도 모교 출신 교사들이 많지만 이들처럼 가르침을 물려준 사제 관계가 4대까지 간 경우는 흔하지 않다.

'맏언니' 곽성희 교사의 30년 교사경력은 3년차 막내 공주희 교사의 10배다. 공 교사는 곽 교사 입장에서 보면 '제자의 제자의 제자'인 셈이다. 하지만 교사들 사이는 세월만큼 멀지 않다. 한밤중에 아이가 열이 나면 전화를 걸어 대처방법을 묻기도 하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찾아가 넋두리를 주고 받는다. 노 교사는 "곽 선생님은 이제 언니 같다"며 "하소연할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간다"고 했다. 2001년 처음 담임을 맡은 이효정 교사는 노 교사에게 학생을 달래는 법을 알려달라고 전화했다. 지난 2008년 이 교사는 자기 후임으로 독서지도를 맡은 공주희 교사에게 독서노트 만드는 법을 조언했다. '교사 비법(秘法)'을 4대째 전수하는 셈이다.

4명의 교사들처럼 모교에 교사로 부임하기란 쉽지 않다. 임용 심사를 맡은 선생님들이 제자들의 단점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이다. 김남영(60) 교감은 "모교를 지원하는 부담을 뚫고 온 교사들이 이렇게 많은 건 우리 학교의 복"이라고 말했다.

이경표(61) 교장은 "우리 학교의 아름다운 전통이 이어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고시(考試)'로도 불리는 임용시험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어 모교 출신이 뚫고 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올해 중·고교 교사 임용고시 경쟁률은 23대1이 넘는다. 안정된 직장인 교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어 경쟁률은 더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30년이나 학생을 가르친 곽 교사는 "여태껏 내가 한 게 없는데 아직도 '스승의 은혜'라는 말을 들으면 쑥스럽다"고 겸손해했다. 노 교사는 "학생들은 저마다 가슴에 꽃 하나를 품고 있는데 이 꽃을 피워가는 모습을 보면 참 행복해진다"며 "꽃이 다치지 않고 잘 피게 하는 게 교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노 교사는 "교사의 사명감은 학원 다닌다고 배워지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4대째 내려오는 선생님들의 인연은 학교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동료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미담으로 들려주곤 했기 때문이다. 공 교사에게 문학을, 이 교사에게 논술을 배우고 있는 배화여고 3학년 박윤지(18)양은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따라 국어 교사가 되어 모교에 와서 5대째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노 교사가 "그럼 4년 뒤에 한 명 더 오겠네. 그럼 내 밑으로는 몇 명이야?"라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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