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대장 아버지, 58년 만에야 카네이션 달아드립니다” [중앙일보] 기사

푸른물 2010. 5. 11. 06:50

대장 아버지, 58년 만에야 카네이션 달아드립니다” [중앙일보]

2010.05.10 00:21 입력 / 2010.05.10 11:56 수정

백선엽 장군이 6·25 때 설립한 육아원 출신 모임 ‘백선회’ 회원들

본지에 회고록을 연재 중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가운데 앉은 사람)은 1952년 지리산 토벌대 사령관으로서 작전을 벌이다가 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육아원을 설립했다. 노년이 된 당시의 육아원생들이 8일 어버이 날을 맞아 백 장군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뒤 “대장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변선구 기자]
“대장 아버지….”

5월8일 어버이 날,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사업회관 429호실 백선엽 예비역 대장(90) 사무실에 들어서서 백 장군의 손을 잡은 김석만(70)씨는 끝내 눈물을 떨어뜨렸다. 김씨 외에 12명의 노인들이 함께 들어섰던 사무실 분위기도 갑자기 숙연해졌다.

58년 만에 백 장군을 ‘대장 아버지’라고 부르며 사무실을 찾아온 13인의 노인들. 그들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무렵 지리산 일대에서 부모와 가족을 잃은 고아 출신이다. 백 장군은 당시 국군 ‘백 야전 전투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지리산에 숨어든 북한군 잔여 병력과 대한민국 내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는 책임자였다.

백 장군은 그때 보육원(당시엔 고아원으로 부름)을 설립했다. ‘백선 육아원’으로 명명한 그 보육원은 백 장군이 전남도청과 국군 및 미 8군, 선명회 등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세우고 운영한 기관이다. 그곳에서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수많은 고아가 전쟁의 참화를 피해 생명을 부지했다.

백 장군의 손을 잡으면서 눈물을 떨어뜨렸던 김석만씨는 “우리를 키워주고 보살펴 준 아버지를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다”며 “내가 성년이 돼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그곳을 찾은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봤지만 차마 다가가지 못한 점이 늘 마음속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해 그곳 육아원 출신들이 결성한 ‘백선회’에서 어버이 날에 꽃을 달아드리자고 해서 결국 오늘에야 찾아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 장군의 가슴에 백선회 회원들을 대표해서 카네이션 꽃을 단 권지순(72·여)씨는 “백 장군님은 우리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자, 많은 것을 이룩한 위대한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님 은혜 감사 드립니다. 백선회 일동’이라고 적은 하얀 봉투에 조금씩 보탠 돈을 넣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용돈으로 쓰세요”라며 백 장군의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일행 가운데는 두 형제도 있었다. 박대춘(69)씨와 박대순(65)씨. 두 사람은 1951년 4월 보리가 파랗게 올라오던 무렵 전북 순창의 쌍치마을에서 살다가 부모를 잃었다. 그 뒤 광주의 포로수용소에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뽑아보낸 15명에 포함돼 백선유아원의 첫 원생이 됐다.

형인 박대춘씨는 “포로수용소에서 동생이 병을 앓아 거의 죽을 뻔했다. 모포에 싸인 동생이 3일 동안 버려져 있던 곳에 나중에 가 봤더니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다”고 했다. “살아 숨을 쉬는 동생을 보는 순간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박대춘씨 역시 말을 끝내 이어가지 못했다.

동생 박대순씨는 “나는 당시 원생 중의 막내였다. 결국 ‘대장 아버지’가 세운 육아원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새 삶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백 장군님은 나를 낳아준 분은 아니지만, 제2의 인생을 살게 해 준 아버지”라고 말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백선육아원은 이들을 대부분 고교 과정까지 이수하도록 지원했다. 백선회 회원들은 그 점을 특히 고마워하고 있다. 이들은 그런 교육과정 지원에다가 자신의 노력을 덧붙여 전국 각지에서 뿌리를 내려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날 백 장군을 찾은 백선회 회원 중에는 중앙부처 국장급 공무원, 서울시 공무원 등으로 활약하다가 은퇴한 이도 있었다.

이들은 백 장군이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에 오르고 참모총장에 취임한 뒤에도 자주 육아원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때 백 장군이 도착할 때 ‘대장 아버지’라고 불렀던 추억이 있어, 지금도 그렇게 백 장군을 호칭한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참석자는 그때 당시의 참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흘마다 세상이 바뀌었다. 빨치산과 우익이 번갈아 가면서 마을을 점령하면 참혹한 살인이 빚어지고는 했다”며 “평시에도 어린이를 보호하는 게 쉽지는 않은데, 전쟁 중에 어린 생명들에 신경을 써준 ‘대장 아버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라고 했다.

백 장군은 회원들로부터 “제 자식이 명문대 법대를 나와 변호사를 하고 있다” “제 아들은 명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번역가로 활동 중”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야 정말 장하다” “정말 반갑구나”라는 말을 연발했다.

백 장군은 “그때 공산주의와 싸우면서 늘 사랑과 자유를 앞세워야 저들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며 “군인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먼저 동족의 어린이들을 거두지 못한다면 결코 진정한 승리를 이루지 못한다는 마음에서 당시 육아원 설립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글=유광종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백선 육아원’의 어제와 오늘=1952년 지리산 토벌 작전 뒤 버려진 고아들을 수용해 생활토록 하는 시설로, 당시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에 세워졌다. 83년 백선사회봉사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88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넘겨져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의 요청으로 정신지체인 아동시설로 운영 중이다. 원래 명칭은 설립자인 백선엽 장군을 기리는 의미의 ‘백선’이었으나 여기에 수녀회 성인인 사도 바오로의 영성을 뜻하는 ‘바오로’를 담아 ‘백선 바오로의 집’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