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워킹푸어 300만명 시대] [2] IMF→신용대란→금융위기 큰 고비마다 아래로

푸른물 2009. 9. 8. 17:42

[워킹푸어 300만명 시대] [2] IMF→신용대란→금융위기 큰 고비마다 아래로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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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7.21 03:09 / 수정 : 2009.07.21 07:49

추락의 길 중산층서 워킹푸어로… '세갈래 내리막길' 굳어지나
① 출구 보일 만하면 불황폭탄 기술이 손에 익어 벌만하면 IMF·신용대란 등 들이닥쳐
② 맞벌이해도 감당 못해 일용직으로 근근히 버텼는데 한쪽이 실직땐 곧바로 추락
③ 직장 잃고 가정도 잃기도 실직하자 가정불화까지 덮쳐

1994년, 주동춘(38)씨는 유럽에서 여우 털을 수입·가공해 다시 해외에 수출하는 모피 가공업체 사장이었다. 25세의 나이에 경기도 성남에 직원 30여명 규모의 공장을 세워 한 달에 최고 800만원까지 벌었다.

그는 "고졸이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목돈을 모아 남보다 빨리 내 사업을 시작했다"며 "몸은 힘들어도 괜찮은 삶이었다"고 했다.

IMF 외환위기가 그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공장이 부도난 것이다. 경기가 나아진 뒤 주변의 도움으로 다시 공장을 열었지만, 신용대란 여파로 2004년 문을 닫았다. 부인과도 갈라섰다. 주씨는 노모와 두 아이를 데리고 월세 30만원짜리 단칸방을 구했다.

IMF 외환위기 후 11년 동안 주동춘씨는 '사장님'에서 타일공으로, 다시 고물을 줍는 처지로 떨어졌다. 지난 8일 주씨가 폐지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서울 방배동 거리를 뛰고 있다./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그는 "제대로 배우면 하루 20만원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타일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십장의 손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서울·대구·부산·광주 등 전국의 건축 현장에서 타일을 발랐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그는 다시 주저앉았다. 그와 십장에게 일감을 주던 건설업체가 망한 것이다. 6개월치 임금 1200만원도 떼였다. 정식 계약서를 쓰지 않고 십장이 알음알음 고용한 인부라 밀린 돈을 받을 길이 없었다.

하루 벌이가 급했다. 두 아이의 고등학교 등록금(1인당 연 140만원)과 급식비·교통비·교재비(월 20만~30만원)에 월세와 식비를 해결해야 했다. 그는 고물을 줍기 시작했다. 성남 집에 들를 돈과 시간을 아끼려고 서울 도심 고시원에 머물며 악착같이 리어카를 끈다. 수중에 10만원쯤 모이면 곧바로 아들에게 송금한다. 수입은 월 120만원이다.

"처음 고물을 주울 때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밑바닥까지 내려왔을까' 싶어 술도 많이 마셨어요. 이제 내가 성공할 길은 없겠죠. 아들이 반에서 1등이에요. 어떻게든 아버지 노릇을 잘하는 게 내 남은 과제지요. 아들은 의대에 가서,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합니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2004년 신용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국가 전체를 뒤흔드는 강한 폭풍이 세 차례 한국 경제에 휘몰아쳤다. 그때마다 한국 중산층은 뭉텅뭉텅 아래쪽부터 잘려나갔다. 삶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린 사람들이 간신히 재기를 꿈꿀 만하면 곧바로 더 큰 파도가 밀려와 이들을 더 낮은 삶으로 떨어뜨렸다. 2009년 여름, 한국의 '워킹푸어(Working Poor·근로빈곤층)'는 300만명을 헤아린다. 전체 국민 16명 중 1명이 열심히 일해도 저축할 수 없는 '제로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IMF 외환위기 후 11년간 한국 중산층 하층부는 빠른 속도로 워킹푸어로 몰락했다. 이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대명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직후 실업자가 대량 발생했고, 이들이 영세자영업자나 일용직·계약직 노동자로 전환됐다가 2003년 신용대란 이후 더 큰 위기를 맞았다"고 했다.

이후 고용과 급여가 안정된 '좋은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들고, 불안정하고 보수도 박한 '나쁜 일자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부부가 모두 나쁜 일자리를 가진 경우 어느 한쪽이 실직하거나 아프면 곧바로 소득이 최저생계비(4인 가족 기준 132만6609원) 밑으로 떨어진다.

◆'나쁜 일자리' 맞벌이→한쪽 실직→워킹푸어

중계동에 사는 조모(54)·김모(55)씨 부부는 지난 연말까지 월 300만~350만원을 벌었다. 남편 조씨는 28년 동안 건축현장에서 일용직 기능공으로 일해 월 200만~250만원씩 가져왔다. 부인 김씨는 고등학교 급식업체에서 일해 한 달에 100만원쯤 받았다. 그 돈으로 방 2개짜리 아파트를 장만하고, 두 아들을 대학 공부시키면서 한 달에 20만~30만원씩 저축도 했다.

지난 연말 건설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조씨 부부는 벼랑으로 몰렸다. 조씨는 "마지막으로 일 나간 게 1월 10일"이라고 했다. 서울·수원·군산 등 아는 사람 있는 곳은 다 가봤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현장 자체가 확 줄어든 까닭이다.

조씨는 올 1월부터 6월까지 구청에서 실업급여(월 90만~100만원)를 탔다. 오는 9월까지 3개월은 서울시가 주는 '위기가정 특별지원금(월 110만원)'을 받는다. 그 후에도 일이 없으면 공공근로에 나가야 한다. 그는 "기술자라 어디 가도 굶진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생활고→이혼→생활고 가중→워킹푸어

남편의 실직 등 경제적인 이유로 이혼한 뒤 혼자 아이를 떠맡은 '싱글 맘'들 중 상당수는 워킹푸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모(46)씨는 1998년까지 남편 월급(420만원)으로 네 식구 살림을 꾸리는 전업주부였다. 외환위기로 실직한 남편은 사업을 하다 망했다. 부부는 2000년 갈등 끝에 갈라섰다. 부인 김씨가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들을 맡았다.

살던 아파트(92.2㎡·28평)는 받았지만, 돈 나올 곳이 없었다. 김씨는 지하철역에서 행주와 고무장갑 노점을 했다. 하루 100명쯤 손님이 오면 김씨 손에 5만원이 남았다.

2005년 지하철역 근처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김씨의 수입은 그나마 반토막이 났다. 김씨는 "안 해본 일용직이 없다"고 했다. 전봇대에 붙은 전단 1500장을 떼고 일당 5만원을 받기도 했다.

김씨는 2007년 12월 장애인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는 매일 오전 8시~오후 8시 서울 노원구와 도봉구의 장애인 가정 2곳을 돌고 월 90만원을 받는다. 아파트 관리비·공과금·아이들 학비를 내고 식비를 빼면 잔고가 '0원'이다.

"몇 만원이 아쉬워서 친척집에 전화하는 심정을 아세요? 낭비도 안 하고 소처럼 일만 하는데 살림이 펴지질 않아요."

◆중산층도 '몰락의 불안감' 확산

중산층 역시 불안감에 젖고 있다. "워킹푸어로 몰락한 내 이웃처럼, 나도 언제 빈곤의 늪에 빠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다.

경북 구미에 사는 김창수(51)씨는 대기업 생산직으로 근무하다 2001년 명예퇴직하고 중소기업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휴대폰 부품회사 계약직이다. 부부는 매주 월요일~금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하고 각각 120만원과 130만원씩 받는다.

남 보기엔 어엿한 중산층이지만, 가계부를 들여다보면 남는 게 없다. 김씨 가족이 한 달 사는 데 필요한 돈은 최소 279만원이다. 3남매 교통비·학원비·용돈 82만원, 식비 75만원, 아파트 관리비 30만원, 공과금 15만원, 보험료 22만원, 큰딸 대학 등록금 내려고 따로 떼어놓는 돈 55만원 등이다.

모자라는 돈 30만원을 메우려고 부부는 주말을 포기했다. 김씨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일당 5만~6만원짜리 막일을 닥치는 대로 한다. 부인은 주말 중 하루는 반드시 출근해 휴일 수당을 번다. 둘 중 하나가 실직하면 아들 학원비를 끊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참 사는 데 희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주위를 보면 다들 새벽부터 밤 늦도록 일하고, 술 마시고 노름하는 것도 아닌데 형편이 나아지는 사람이 없어요. 나이 들면 나도 지금처럼 일을 못할 거라는 생각에 하루하루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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