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미영의 '등반 파트너' 김재수 대장
연인이 아니더라도 우정을 나눌수 있지 않나 그녀의 열정, 마음에 닿아
여자의 행복 모르고 살아 오로지 운동과 등반훈련 자기와의 싸움만 했다
"고미영씨와 10번의 히말라야 원정을 했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시샤팡마봉에서 '업고 정상에 데려갈 수는 없지만 만약 미영씨가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을 때면 내가 그 옆에서 같이 죽어줄게'라고 말했다. 그게 내 진심이었다. 우리 관계에서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김재수(48) 대장의 얼굴은 굵고 진하게 타 있었다. 화형(火刑)을 막 당한 것 같았다. 히말라야의 강렬한 광선과 눈(雪), 슬픔으로….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목표로 했던 고미영씨의 등반 파트너였다. 등반을 위한 파트너 계약은 국내에서는 생소한 개념이다. 그는 히말라야 10개 봉우리를 고미영씨와 같이 등반했다.
―매스컴에는 당신이 고미영씨의 연인으로 소개됐다.
- ▲ 김재수 대장은“고미영씨와 함께 등반할 때 행복했고 우린 연인을 뛰어넘는 애틋한 관계였다”고 말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어쩌다 연인 관계라는 말이 퍼진 것인가?
"고미영씨는 4년 전 연하의 한의사와 결혼 얘기가 있었다. 가족 상견례를 했고 결혼 날짜를 잡는 말까지 나왔다. 그녀는 '등반과 결혼 두 가지에 다 충실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면서 유럽으로 100일간 등반 여행을 떠났다. 그 사람 생각이 나면 즉시 돌아와 결혼하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등반하는 동안 그 사람 생각이 한 번도 안 났다고 한다. 그녀는 이메일로 이별을 통보했다. 이런 내용을 그녀 다이어리의 첫 장에 적어놨다. 이를 나와 연관지어 모(某)스포츠지에서 '결혼할 사이'라고 보도했다."
―힘들겠지만 이왕 말이 나온 이상 사실 관계는 분명히 하는 게 낫다.
"주변에서 '두 사람이 잘 어울리고 앞으로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 미영씨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나중에 목표로 한 등반을 끝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남녀 감정이 개입되면 등반이 안 된다. 이런 시선 때문에 베이스캠프에서 텐트를 칠 때도 멀찍이 떨어져 쳤다."
―결코 연인이 아니라면 그런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연인이 아니더라도 우정을 나눌 수가 있지 않은가. 그녀의 열정이 내 마음에 닿았던 것이다. 미영씨는 여자로서 느껴야 할 행복감은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오로지 운동과 등반 훈련, 자기와의 싸움만 했다. 그게 안타까웠다. '당신은 여자고 여자다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굴 만날 때면 말투와 옷차림을 어떻게 하라는 것까지 조언했다. 내가 옷을 사준 적도 있다. 우리는 파트너였다. 어쩌면 연인보다 더 애틋한 관계일 수 있다. 그걸 이해해야 한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봄 에베레스트 등반 때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경남 김해원정대를 꾸릴 때 미영씨가 '함께 가게 해달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원정 경비가 부족했던 상황이라 '후배 대원들은 1500만원씩 내지만 당신은 선배 축에 속하니 300만원을 더 내라'고 했다. 출발날 인천공항에서 처음 인사했다. 그녀는 2년 전에 실패했던 에베레스트봉의 정상에 섰다. 하산하면서 전진캠프에서 함께 머물 때 '곧바로 파키스탄의 브로드피크봉을 등반할 작정인데 같이 가달라. 난 고산등반을 아직 모른다'고 부탁했다. '나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어 더 이상 비울 수 없고 나이도 지났다. 도저히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등반 파트너로 맺어졌나?
"미영씨는 소속회사(코오롱)에 국제전화를 걸어 나를 자신의 등반 매니저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14좌를 완등할 계획이니 도와달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내 의사는 상관없었다. 당돌하게 느껴졌다. 자기 꿈을 위해 이렇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 번만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네팔에서 귀국하지 않고 둘이서 파키스탄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 비행기 안에서 졸던 그녀가 힐끔 내 쪽을 쳐다보면서 '어깨에 기대도 되나'고 묻기에, 난 '안 된다'고 했다. 남녀 둘이서 등반을 갈 경우 세상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둘이 한 조(組)가 된 브로드피크봉 등반은 어떠했나?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했다.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라섰을 때 정말 대견해 그녀의 등을 두드려줬다. 어떻게 표현할까, 밝은 성격의 미영씨와 함께 있을 때 난 정말 행복했다. 그건 틀림없다. 참 많은 얘기를 했다. 어린 시절의 얘기, 이혼의 아픔, 앞으로의 꿈에 대해…. 내게는 못할 얘기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하필 정상 가는 날에 생리하네' 하는 말까지 했다. 그 등반을 마친 뒤 나는 '이 사람의 꿈을 위해 끝까지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회사측과 매니저 계약을 맺었다."
―정확하게 요구받은 등반 파트너의 임무는 무엇이었나?
"함께 등반하면서 여러 상황에서 코치하고, 등반 일정이나 정상 공격 날짜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진과 동영상 촬영도 맡는다. 이런 촬영을 하려면 두 배의 체력이 소모된다."
―고산등반 경험이 있다 해도 히말라야 등반은 당신에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아직 히말라야에서 지친 적이 없다. 1993년 산(山)전문지에서 대한민국에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가장 빨리 할 산악인으로 나를 꼽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8000m 봉우리 3개를 올랐을 때 엄홍길씨는 1개였다. 하지만 난 개인 사업체를 갖고 있었고 그때 이미 아이도 있었다. 14좌를 계속 할 만한 여건이 안 됐다."
―고미영씨와 히말라야 10개 봉우리를 함께하는 동안 고씨는 언제 가장 힘들어했나?
"지난여름 다울라기리봉 등반이 가장 힘들었다. 다른 원정대들이 모두 철수한 다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등반로에 설치돼 있던 고정로프들이 모두 눈에 묻혀 있었다. 로프를 전부 꺼내면서 등반을 했고, 로프가 없는 구간도 많았다. 정상 공격하는 날에는 너무 날씨가 나빠 어느 봉이 정상인지 구분이 안 돼 거의 도달하고도 다시 마지막 캠 프로 철수했다. 하루를 쉬고 같은 길을 다시 올라갔다."
―그때도 등정을 한 뒤 하산에서 문제가 있었나?
"하산하면서 미영씨가 탈진해 잠깐 정신을 잃고 눈 위에 드러누웠다. 나는 이틀쯤 안 먹고 운행해도 별 느낌이 없다. 스포츠클라이밍으로 단련된 미영씨는 근육량이 많아 배가 고프면 갑자기 힘이 쫙 빠지는 스타일이었다. 난 그녀를 위해 항상 여분의 간식을 갖고 다녔다. 그녀에게 사탕을 건네니, '내가 당뇨가 있나. 배만 고프면 힘이 없지' 말했다. 함께 하산하던 세르퍄는 먼저 내려간 뒤였다. 그녀는 '대장님도 먼저 내려갈 거죠?' 웃으며 물었다. '당연히 내려가야지. 그러나 널 혼자 버려두고는 안 내려간다'고 했다."
―작년 여름 K2봉 원정이 더 치명적이었지 않았는가? 그때 함께 등반한 경남연맹 원정대 3명이 눈사태에 휩쓸려 숨졌고, 당신과 고미영씨는 이들보다 불과 몇 시간 빨리 하산해 위기를 모면했다.
"난 고미영씨와 함께 등반하면서 그 원정대의 대장을 맡았다. 8월 1일 밤 나를 비롯해 5명이 정상에 선 뒤 일렬로 하산했다. 8200m의 보틀넥(병목) 지점에서 내가 선두로, 그다음 외국 산악인, 세 번째로 고미영씨가 내려왔다. 그다음 차례부터 못 내려왔다. 1m 간격으로 내려왔는데, 왜 뒤따라 못 내려왔는지 이유를 모른다. 내려와서 보니까 그 지점에 불빛들이 쭉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아침 내려오다가 눈사태를 맞은 것이다. 후배 대원 3명을 포함해 총 11명이 숨졌다. 대형사고였다. 공교롭게도 이번 고미영씨 사고처럼 같은 파키스탄이고 여름시즌이었다. 고미영씨 영결식을 마치고 이틀 뒤, 이들의 1주기 추모제가 있었다."
- ▲ 생전의 산악인 고미영.
―K2봉에서 후배를 잃는 참사를 겪고도, 바로 그해 가을 마나슬루봉으로 원정을 갔다. 그런 마음이 들던가?
"어떻게 얘기를 해야 되나. 힘든 얘기인데… 산에 안 가면 비겁한 사람이 된다."
―그게 왜 비겁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사람의 할 짓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거기서 사고 났으면 그걸 뛰어넘어야 한다. 고미영씨의 14좌 완등 계획을 계속 밀고 가야지, 산을 피해버리면 비겁한 것이라 생각했다. 미영씨도 등반을 강행해야 한다는 쪽이었고, 나도 이왕 시작한 이상 가을등반을 하자고 했다."
―여성 산악인끼리의 14좌 완등 레이스에서 고미영씨가 너무 서두른다는 느낌이 없었나?
"매스컴과 주변에서 그 경쟁을 불붙였다. 올해 갑자기 목표 시기가 당겨진 것이다. 경쟁에서 1등과 2등은 천지차다. 여성으로 최초 완등을 하면 개인의 명성으로 스폰서 기업에 환원해줄 수 있는 것이다. 프로는 그런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신도 그 경쟁에서 결코 질 수 없다는 책임감을 느꼈는가?
"스포츠팀의 감독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겠는가. 기왕 시작된 것이면 1등을 만들어야지, 2등을 만들면 왜 매니저가 필요한가. 서두르게 한 책임이 내게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처음에는 14좌 완등을 한 해 뒤로 미뤘으면 했다. 하지만 올봄 시즌에서 마칼루와 칸첸중가봉을 마치고 나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올해가 윤달이 있는 달이라 다울라기리봉 등반을 해도 될 것 같은데 생각이 어떤가'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미 고소 적응이 다 되어 있어 등반은 열흘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산악계 일각에서는 "고산등반이 스포츠게임처럼 됐다"며 과열경쟁을 비판해왔다.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받아들이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등반 기회를 누구든 놓치고 싶지 않는 것이다. 산악인의 꿈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기업체를 욕할 수는 없다."
―마지막 낭가파르바트봉 등반에 대해 이야기하자. 7월 10일 오후 7시11분 등정한 뒤 하산 길에서 사고가 났다. 그때 곁에 있지 않았나?
"하산 과정에서 캠프3에서 캠프2로 내려올 때 100~200m 이상 간격이 있었다. 루트가 좁아 내가 먼저 내려오고, 다른 대원, 고미영씨 순이었다. 대략 6500m 지점에서 쳐다본 게 마지막이었다. 곧 내려오겠지 하며 텐트에서 물을 끓이며 기다렸다."
―슬픔이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순간은?
"다음 날 아침 헬기를 불러 추락 추정 주변을 수색했다. 20분 동안 그 주위를 4바퀴 돌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 4회를 돌고 못 찾고 돌아가려는데, 내 눈에 뭔가 걸렸다. '찾았다 돌려라!'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추락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보았나?
"도착 직전 난 1초의 희망을 걸었다. 아직 숨진 게 아니라, 제발 몸이 부자연스러워 누워 있기를. 후배들에게 '기다려라'고 한 뒤 내가 먼저 다가갔다. 머리 뒷부분에 핏물이 고여 있었다. 햇볕과 눈에 며칠간 노출된 얼굴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내가 쓰고 있던 바라카바(얼굴을 가리는 방한용 복면·balaclava-발라클라바)를 뒤집어 그녀의 얼굴에 씌웠다.
파키스탄 병원에서는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데, 여자선배가 '그 얼굴을 보면 평생 어른거릴 것 같다'며 못하겠다고 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혔다. 남자는 안 된다고 했지만, 내가 남편이라고 거짓말했다."
그는 고미영씨가 끝내지 못한 남은 봉우리에 모두 오르겠다고 했다. 25일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으로 떠난다고 꼭 써달라고 부탁했다.
▲3일자 A29면 '최보식이 만난 사람-고미영의 등반파트너 김재수 대장' 기사에 나오는 '바라카바(얼굴을 가리는 방한용 복면)'는 그런 용어로 통용되고는 있지만, 정확한 표기는 '발라클라바(balaclava)'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코펠'로 정착된 등산용 취사도구도 원래는 '코헬(kocher)'이 옳은 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