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최보식이 만난 사람] "원래 정치가 꿈… 난 한사람한테 충성 다 바치는 스

푸른물 2009. 8. 21. 08:45

최보식이 만난 사람] "원래 정치가 꿈… 난 한사람한테 충성 다 바치는 스타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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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8.10 03:10

'귀화 한국인'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
"공직 언질 받았지만 인수위에 끼지 못하고 비례대표에도 밀려나 난 끝난 줄 알았었다"
"오래전 통일교와 멀어져 내 신앙 뿌리는 기독교…
이(李)대통령 당선된 뒤에 소망교회 다니기 시작"

"대선 당시 한반도 대운하 팀에서 나를 특보로 추천했다. 이미 조직이 다 짜여 있었지만, 막판 두 달을 남겨두고 '적극적으로 대운하를 홍보하자'며 내게 연락이 왔다. 원래 약속은 '당선되면 공적인 자리를 하나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선된 뒤 나를 빼버렸다. 인수위에도 못 들어갔다. 찾아가서 '왜 날 안 쓰나'고 물어본 적은 있지만,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참(55)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말'에 솔직한 쪽이었다. 당초 "독일에서 일년 살아보니 독일인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믿어도 되더라"고 내가 운을 뗐을 때, 그는 얼굴을 붉히며 그렇지 않다는 고갯짓을 했지만.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
―그런 인연으로 작년 총선 때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신청도 하게 됐나?

"마감 하루 전 당(黨)에서 비교적 '영양가' 있는 분이 신청하라고 했다. 일본은 폐쇄사회임에도 국회의원 3명이 귀화인이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면 열린 사회로 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역사적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싶어 급하게 냈다. 중간에 당선 축하 전화까지 받았는데 결국 순위에 안 들어가 있었다."

―이번 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된 게 그 때문인가?

"이번에는 선거 때 공 세웠다고 그런 게 아니다. 관광공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야겠다는 청와대의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집무실과 부속실 통로에는 축하화분들이 4열 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지난 한주만 30여개의 언론매체에서 인터뷰를 신청해왔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 "6개월간 술을 끊겠다"는 식의 말 한마디가 뉴스가 될 정도였다. 그의 사장 임명은 '흥행'에서는 확실히 성공했던 셈이다.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아니라, 당신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TV드라마 '딸부잣집'(1994년)에서 외국인 둘째 사위로 나왔을 때, 한 기자가 '한국 국적이니 대통령도 될 수가 있지 않나?' 물었다. 현행법상 귀화한 지 5년만 되면 대통령 피선거권이 있다. 그래서 '국민들만 원하면 되는 것이지'라고 농담했지, 대통령 되겠다는 욕심은 없다. 하지만 장차 한국의 발전 과정에서 그런 시기가 올 것이다. 남미 페루에는 일본계 후지모리 대통령, 오바마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인, 사르코지의 아버지는 그리스인, 그 부인은 이탈리아인이다. 한국은 가장 개방적인 다문화 사회가 될 수 있다. 똑같이 생긴 사람만이 한국인이 아니다. 내가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정치적 욕망이 강한 것 같다.

"사회에 영향을 주고 싶은 욕망은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정치라고 본다."

―귀화를 안 하고 독일 사회에 살았다면 무얼 했을까?

"정치를 했을 것이다. 학생 시절부터 최연소 학생 대표를 맡아 기민당(黨)에서 활동했다. 당시 우리 주지사였던 헬무트 콜 수상처럼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독일에는 교사 출신 정치인들이 많다. 시간 여유가 있어 지역 기반을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한 그해 1년만 '놀고' 교사가 될 작정이었다. 차가 나오고 여행할 기회가 많은 매력적인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본(Bonn)에 사무실이 있던 국제문화재단의 강사였다."

―그 국제문화재단을 통일교에서 운영한다는 걸 알고 들어갔나?

"물론이다. 신학을 전공하면서 신흥종교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 이 재단에서 일하던 1978년 9월 한국에 초청받게 된 것이다. 정말 매력적이었다. 한국은 500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젊은 사회다. 말하자면 나와 궁합이 맞았다."

―당시 유신정권 시절인데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말인가?

"유럽에서는 한국 이미지가 '독재' '감옥' '경찰국가'여서 처음에는 경계심이 있었다. 막상 와보니 다 틀린 말이었다. 세상에서 한국처럼 불교·유교·기독교·가톨릭·무속신앙이 공존하는 나라도 드물다. 더욱이 대립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런 나라가 세계평화나 다문화의 모범 사례를 만들 수 있다고 봤다."

―한국에 오래 눌러 살려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일에서의 정치 꿈도 있었을 텐데.

"6개월 체류 예정이었는데 계속 연기했다. 독일에 있으면 나는 수많은 독일 사람 중 하나이지만, 한국에서는 '특이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상품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당신은 1986년 귀화를 했다. 그 시점에서 귀화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나?

"여러 가지 경제활동을 하다 보니 비자 때문에 불편했다. 어차피 한국에서 계속 지낼 거면 편하고 떳떳하게 살고 싶었다. 국제결혼 동기가 외국에 나가 사는 것이었던 아내(1982년 결혼)로서는 이런 결정에 불만이었다."

―이름을 '독일 이씨' 본관으로 '이한우'라고 했다. 직접 작명했나?

"옥편에서 찾아서 '韓佑(한국을 돕겠다)'로 했다. 내가 음양오행 팔괘 같은 역학 공부를 좀 했다. 당시 주변에서 작명가에게 내 사주를 줬는데 '한우'라는 이름이 똑같이 나왔다. 한자는 다르고."

―2001년 현재의 이참(李參)으로 개명했다. 왜 그랬나?

"그때는 '이한우'라는 이름의 역할을 다 했기 때문이다. 역학자들도 '한우란 이름은 친구 만들기는 좋은데 출세하기에는 안 맞다'고 했다. 새로운 밀레니엄(1000년)을 맞으면서, 이젠 한국사회에 내가 본격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이었다."

―언젠가는 또 이름이 바뀌겠군.

"이게 마지막이다. 1 밀레니엄마다 한번 바꾸지, 만약 내가 천년 이상 살면 몰라도(웃음)."

―무슨 사업이나 큰일을 할 때 점집이나 무당을 찾아가 본 적이 있나?

"문화적 차원에서 관심이 있지만, 내가 점을 믿는 것은 아니다. 내 종교적 신앙의 뿌리는 기독교다."

―당신은 한국에서 강사·강연·방송출연·기업체 자문을 했지만, 직접 ㈜참스마트와 ㈜빅웰 같은 회사를 차린 적도 있었다.

"인터넷 상거래 회사였던 ㈜참스마트는 투자받는 데 실패했다. 본전도 못 보고 어설프게 빚만 안았다. ㈜빅웰은 와인 수입업체였다. 내가 마시고 싶은 와인을 합법적으로 들여오려고 비즈니스한 것이다. 내가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정도로 수입이 있었지, 역시 시원찮았다."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저녁 약속은 한 달에 서너 번밖에 없다”며 “가족과 함께 있는 게 낫다”고 말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그러면 주 수입원은?

"기업체 자문이나 특강, 방송출연이다. 처음 교육방송에서 5년간 독일어 회화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수사반장'에서 처음 단역으로 출연한 뒤로, 당시 한국말 되는 외국 사람이 없어 미국인·이탈리아인 등 외국인 역할을 다 했다."

―치킨 체인가맹점의 전단지에 광고모델로 나왔던 걸 기억한다.

"CF는 30회쯤 찍었는데 그것도 좋은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그 치킨 광고는 출연료도 못 받고 사기를 당했다."

―우리말을 어떻게 배웠나?

"학원 다닌 적이 없다. 처음부터 혼자서 자습했다. 매일 규칙적으로 공부한다. 가령 날마다 단어를 10개씩 외우면 시간이 지나 까먹는 것이 있어도 몇 개씩은 꼭 쌓이게 된다. 그게 외국어를 습득하는 내 스타일이다."

―한국에서 30년을 살았지만,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게 무엇인가?

"난 처음부터 다 이해가 됐다. 이제는 독일에 돌아가면 더 답답하다. 한국처럼 편한 나라가 없다. 한국인은 융통성이 있고 뭘 해도 싱겁게 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한다. 몇 년 전 골프를 '한국식으로' 배웠을 때 하루에 연습장에서 1000개씩 공을 때렸다. 한 달 만에 담에 걸리고 나중에는 갈비뼈가 부러졌다. 독일이나 외국에 골프 배우다가 갈비뼈 부러진 사람 없지만 한국에는 많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사회에서 귀화해 살아보니 통일교를 갖고 있는 게 불편했나?

"통일교와 멀어진 것은 사회적인 눈치를 봤기 때문은 아니다. 종교는 하나님의 뜻이다. 세상 사람이 뭐라 하든 관계없다. 그건 언젠가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다."

―통일교에서 언제 왜 개신교로 바꾸었나?

"통일교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점점 깊이 들어가니까 아닌 것이 많았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 살고 있는 한남동 집으로 이사 온 게 16년 전인데 그전부터 멀어졌다. 하지만 신앙은 그대로 있으니까 일반 교회에 나갔다."

―일각에서는 '소망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

"우리 부부는 기도를 많이 한다. 그런 기도에서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를 가봐야겠다는 강력한 것을 받았다. 그래서 아내가 큰 교회의 새벽기도에 돌아가며 나갔다. 신앙도 신앙이지만 함께하는 사람들과 분위기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소망교회를 결정한 것이다.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뒤였다."

―타이밍상 세간의 오해를 살 만하다.

"소망교회를 택했을 때 그런 오해를 받을까 봐 꺼렸다. 하지만 내 신앙인데 그건 관계가 없다. 교회 안에서 대통령을 만난 적도 없다."

―대통령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나?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던 시절 서울시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매달 한 번 다른 홍보대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내가 와인을 갖고 가 소개하기도 했다. 그 정도다.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개인적인 관계가 이뤄진 적은 없다. 앞으로 (친분을) 만들어야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위해 '통일 대통령의 적임자'라는 취지로 TV 찬조 연설 녹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것이 관광공사 사장직을 수행하는 능력과는 상관이 없다고 나는 본다.

"관광공사는 정치하는 자리가 아니다. 일하는 자리다. 그 연설은 나도 잊고 있었다. 난 정치인이 아니고 유권자다. 이것 좋다 저것 좋다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참신했고 나라를 위해 뭔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봤다. 그런 찬조 연설 요청이 왔을 때, 나는 '독일 통일로 비춰보면 형의 입장에서 동생을 달래듯이 베푸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지했다. 아마 강력한 지지가 아니기 때문에 녹화만 했지 방영은 안 된 것 같다. 그걸 했다는 걸 후회하지 않는다."

―현 정권 들어와, 각 정부부처와 공기업에 지난 정권과 관련된 사람들을 대부분 밀어냈다.

"그게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다. 물론 공사 사장은 정치적 발언을 안 하겠지만, 앞으로도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정책이나 발상에 대해서는 좋다고 말할 것이다. 말할 기회가 있고 내 자리에서 곤란하지 않다면 말이다. 난 한 사람한테 충성을 바쳐 모든 걸 따라가는 스타일은 아니다. 대통령도 그런 스타일을 기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에서 나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

―독일에서 일년간 살아보니 독일 사람들은 가정적이었다. 해지기 전에 귀가하더라.

"나는 여기서 독일인을 거의 만나지 않지만, 그 점에서는 독일인이다. 나도 업무가 끝나면 바로 귀가한다. 저녁 약속은 한달에 서너번밖에 없다. 가족과 같이 있는 게 낫다. 앞으로 어떨지 모르나. 집에는 아내와 딸, 강아지가 있다. 대화해야지 산보시켜야지, 얼마나 바쁜데."

195㎝ 장신인 그가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