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거리 가족
취업·진학이 가장 큰 이유 명절·경조사 돼야 '상봉'
매일 몇차례씩 전화통화 '가족일기' 쓰며 정(情) 확인
공무원 이혜원(가명·33)씨네 식구는 '주말 가족'이다. 주중(週中)엔 떨어져 살다 주말에만 한곳에 모인다. 이씨는 서울에서, 전자회사에 다니는 남편(37)은 충북 청주에서 생활하고 아들(5)과 딸(2)은 대구의 시부모댁에 맡겼다.이씨 부부는 매주 금요일 오후 서울과 청주에서 각각 기차를 타고 대구로 향한다. 어린 남매는 금요일만 되면 몇 시간이고 문 밖에 앉아 엄마·아빠가 선물 꾸러미를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일요일 밤 우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나올 때면 이씨 부부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서울의 한 대학 조교수로 근무하던 남편이 3년 전 직장을 옮기면서 육아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퇴근이 늦는 경우가 잦았고, 보육시설은 변변치 않았다. 가사를 도와주던 남편마저 청주로 내려가면서 이들은 결국 '이산가족'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이씨네처럼 취업·진학 등의 이유로 떨어져 살지만 가족의 유대감을 유지하는 '원(遠)거리 가족'은 270여만 가구(2008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가구의 16.5%로 여섯 가구 중 하나꼴이다.
맞벌이부부가 대세가 됐고, 경제의 광역화·글로벌화로 근무지가 전국·세계 각지로 확산됐으나 자녀 보육 여건은 늘어가는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등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과거에도 자녀의 진학이나 아버지의 전근 등으로 따로 사는 경우는 적지 않았지만 부부나 자녀 중 어느 한명이 떨어져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부부와 자녀가 모두 흩어져 식구 수만큼 주소지가 생기는 경우도 잦다.
나아가 한달에 한번쯤 모이는 '월말 가족'이나 1년에 한번 만나는 '연말 가족'도 드물지 않아졌다. 서울 잠실에 사는 주부 이진희(56·가명)씨 가족이 그렇다.
이씨 가족 네 식구는 현재 국내외 네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조선회사 직원인 이씨의 남편은 경남 통영, 전자회사에 근무하는 아들(28)은 경기도 파주, 보석디자인 유학을 떠난 딸(26)은 미국 뉴욕에 있다. 1년 중 거의 대부분은 이씨 혼자 서울의 아파트를 지킨다.
네 식구를 잇는 동선(動線)을 거리로 계산하면 1만여㎞에 달한다. 온 가족이 모이는 것은 1년에 딱 한번, 딸이 방학을 맞아 한국에 오는 열흘 남짓한 기간뿐이다.
경기도 안산에서 대학에 다니는 김병주(26·4학년)씨의 세 식구는 '월말 가족'쯤 된다. 김씨의 고향은 부산이지만 6년 전 유통업체에 근무하는 아버지(57)가 서울 본사에 발령받고, 김씨도 대학에 진학하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취업 준비에 바쁜 김씨는 2~3주에 한번 꼴로 서울의 아버지 집을 찾아가고, 아버지는 한두 달에 한번쯤 어머니(53·주부)가 지키는 부산 본가(本家)에 내려간다. 세 식구가 다 모이는 것은 설·추석 같은 명절이나 집안의 경조사 때 정도다.
- ▲ 몸은 떨어져 있어도 가족의 정(情)은 변함없다. 6년째‘원거리 가족’으로 살고 있는 대학생 김병주(오른쪽)씨 가족이 27일 안부 전화를 나눴다. 아버지 김승용(왼쪽)씨는 서울 강동구의 회사 사무실에서, 어머니 주숙희(가운데)씨는 부산 해운대구 자택에서 전화를 받았다./강현동 인턴기자(광주대 사진과 1년)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떨어져 있지만 원거리 가족의 유대감은 여느 가족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몸이 떨어져 있는 만큼 마음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몇 곱절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대구 시댁에 맡긴 이씨 부부는 매일 '오늘은 가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고, 가족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가족 일기를 쓴다.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 통화를 하며 아이들과의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애쓰기도 한다.
발달한 디지털 통신기술은 원거리 가족들을 이어주는 유용한 도구가 되고 있다. 조희금 대구대(가정복지학과) 교수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블로그, 국제전화, 화상 통화 같은 과학기술의 도구가 원거리 가족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에 사는 신모(50)씨네는 영상통화 휴대폰과 인터넷 커뮤니티 '싸이월드'의 도움을 톡톡히 봤다. 신씨 부부는 원래 광주 토박이지만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48)가 섬 지역으로 발령을 받고 딸(26)과 아들(22)이 각각 서울과 대전 소재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국에 흩어져 '네 집 살이'를 하게 됐다.
객지 생활하는 딸·아들이 걱정스럽던 신씨는 영상 휴대폰이 나오자 딸에게 선물로 사줬다. 이들 식구는 휴대전화 액정화면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신씨 부부는 아이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도 자주 들러 본다. 그래서 각자의 생활에 대해서도 훤하게 꿰고 있다.
전문가들은 비록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지만 함께 생활하지 않는 원거리 가족들은 '정서적 유대'라는 가족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통신 매체 등 다양한 수단을 써서라도 서로를 맺어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김외숙 방송통신대(가정학과) 교수는 "서양학자들은 원거리 가족이 한국과 일본에서 특히 많다며 학문적 관심을 보인다"며 "한국인은 가족주의가 강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가족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