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가족의 재구성] [5] 법적으론 '남남'… 처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

푸른물 2009. 8. 5. 07:48

가족의 재구성] [5] 법적으론 '남남'… 처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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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7.30 02:20

공동체 가족
과거엔 독거 노인이나 도움 필요한 아동에 한정
요즘은 직업·취미 따라 다양한 형태 가정 생겨

경기도 안산시에 사는 오순석(32·대안학교 교사)씨 가족은 식구 9명의 대가족이다.

붉은 벽돌 다세대주택 4층의 오씨 집 현관엔 10여 켤레의 신발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낡은 참고서가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높이로 쌓여 있다. 옷가지가 빽빽하게 널린 빨래 건조대 3대가 한눈에도 식구 많은 집임을 알려준다.

오씨네 식구 9명의 가족 구성은 남다르다. 아이들 7명 중 막내(2개월)와 그 위(3)만 오씨 부부가 낳은 아이다. 13~18세의 나머지 5명은 최씨·장씨·임씨·김씨·조씨 등 성(姓)이 제각각이다. 부모 이혼이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친부모와 살 수 없어 오씨 부부가 맡은 아이들이다.

피가 섞이지 않았고 가족등록부에도 올리지 않았지만 오씨 부부에겐 친자식이나 다름없다. 혈연관계를 떠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 가족'인 것이다.

공동체 가족들 모임인 한국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에 따르면, 보호가 필요한 아동·청소년을 위한 공동체 가정은 지난해 348가구였다. 2004년의 104가구에서 4년 사이 3배 넘게 늘었다. 노인 공동체 등 다른 종류의 공동체 가족까지 합하면 그 수가 훨씬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오씨네 같은 공동체 가족은 법적으로 가족 관계가 아니다. 외형적으로는 고아원 같은 일반 복지 시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공동체 가족'은 단순한 복지·수용 시설이 아니라, 정서적 유대를 맺는 가족의 역할을 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조희금 대구대(가정복지학과) 교수는 말했다.

◆동병상련 모여 '가족'으로

오씨 집엔 요즘 하루에 빨아야 할 수건이 30장 넘게 나올 만큼 가사 일부터 넘쳐난다.

가족들은 '민주적'으로 업무를 분담한다. 식구들이 제일 하기 싫어하는 설거지는 가위바위보나 사다리 타기로 결정하고, 방을 치우거나 쓰레기를 비우는 일 등은 모두 조금씩 분담하는 식이다.

아이들 각자가 품고 있는 고민이 다르다는 점도 오씨 부부와 아이들이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 중 하나다. 중학교 때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은민(18)이는 올해 볼 수능이 가장 큰 당면과제고, 자동차 정비를 하는 성택(18)이는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고교 검정고시를 본 후 통닭집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일(18)이는 돈 모으는 게 제일 큰 관심사다.

부부는 아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 달에 한 번꼴로 하루를 완전히 비워 놓고 돌아가면서 한 아이를 지정해 '데이트'를 한다. 이날은 영화를 보거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는 등 아이가 원하는 일을 같이하면서 하루 꼬박 그 아이하고만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다양해진 공동체 가정

고아원 등 과거의 아동·청소년 복지시설은 '특별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장소'라는 선입견 때문에 지역사회로부터 정서적으로 격리돼 있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 가정은 오히려 공동체 밖의 사람들까지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지역사회에 동화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청룡동의 한 단독주택 3층엔 저녁 시간만 되면 식탁 4개가 동시에 펼쳐지고,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50여명의 아이들이 모여 다 같이 수저를 든다.

이 가운데 11명은 민외순(57)씨가 남편(66)과 함께 운영하는 공동체 가정에서 살고 있는, 보호자 없는 아동들이다. 그 외 40여명은 인근 맞벌이 가정, 조손(祖孫) 가정에서 모인 아이들이다. 민씨 부부가 어차피 대규모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김에 어렵게 사는 이웃들 아이까지 불러모으기 시작한 게 일종의 '규칙'이 됐다.

때로는 '상황'이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경남 의령군 만천리 마을회관에는 2007년부터 할머니 6명이 모여 자매처럼 살고 있다.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누군가가 아프면 머리를 짚어주고 닭죽도 끓여 나눠준다.

배우자를 일찍 여읜 동네 노인들 가운데 친한 노인들끼리 뭉쳐서 만든 이 공동체는 이제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할머니들의 '제2의 가정'이 됐다. 양로원 같은 공공 사회복지 시설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만든 조직이라서 규정도, 가입 조건, 제약도 없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김하나(가명·34)씨는 15년쯤 뒤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 가정을 꾸릴 계획을 갖고 있다. 가족에게 "비혼(非婚)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김씨와 그녀 주변의 친구들이 꿈꾸는 미래 가정의 모습은 독신 여성들이 독거(獨居) 할머니들과 '엄마·딸'이 되어 함께 사는 여성 공동체다.

강학중 한국가정경영연구소장은 "과거엔 공동체 가정이 혼자 사는 독거 노인이나 보호가 필요한 아동층에 한정돼 있었다면, 요즘은 직업·취미에 따라서 혹은 '육아 공동체'처럼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가정이 생겼다"고 말했다. 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