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호떡집엔 파리가 날렸다. 반면 맞은편 호떡집엔 사람이 바글거렸다. 그 쪽은 얇게 만든 맛좋은 호떡을 팔았다. 내겐 두껍게 만드는 것 외에 다른 기술이 없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였다. 간혹 우리 집을 찾은 사람은 호떡 양이 많거나 내가 엄청 반가워했기 때문에 왔을 것이다. 의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그 때 배웠다. 호떡 장사는 석 달만에 그만두었다.
그로 인해 돈을 벌어 공부하려던 꿈도 펼치지 못하고 서울 거리를 방황해야만 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잊지 않았다. 남한테 빌어먹고 다니는 건 남자로서 치욕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왜 지금 취업난인가? 지금도 막노동하면 먹고 살 수 있다. 하버드 대학 나와도 일당 받고 막노동 할 수 있는 거다. 막노동은 직업이 아닌가? 막노동 하면서 잠시 정지하고 자신을 추스릴 수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도전을 해야 한다. 몸 튼튼할 때 1년이라도 그런 일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택시를 탔을 때 잔뜩 화가 나 있는 운전사의 뒷머리를 만날 때가 있다. 한 눈에 봐도 자기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내 사전에 '벼락스타'는 없다. 젊은이라면 대단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불자이지만, 하나님이 다 균형잡혀 살도록 한다고 믿는다. 누구든 머리가 좋든지, 사교성이 있든지, 체력이 뛰어나든지 뭐든 한 가지는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20대부터 인생의 동반자가 된 엄앵란과 함께 '청춘스타'로 불려왔다. 어찌 하다보니 벌써 영화 데뷔(1960년 1월 '로맨스 빠빠') 50년을 넘겼다. 그 동안 506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고, 1년에 40편이 넘는 작품을 찍었고, 62살(1999)에 대한민국 최고령 초선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실패와 아픔도 많았다. 항상 인생이란 마라톤을 맨발로 뛰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맨발로 뛰는 중이다. 2008년부터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을 맡아 뮤지컬의 현장에서 젊은이들을 만난다. 젊은이들이 행사장에서 나를 알아보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한다. 그들에게 뭔가 도움이 됐으면 한다. 한 지인은 나를 다른 사람에게 '인생의 멘토'라고 소개한다. 그 말이 어떤 칭찬보다도 기쁘다. 그래서 대단한 책임감을 느끼고 똑바로 살아야 겠다고 다짐한다.
모두들 내가 잘 생겨서 쉽게 성공한 줄 알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인생에서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이 칼럼에 임한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지금도 어디선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맨발로 뛰겠다.
정리=장상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