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자락 맑은 하늘에 날려보낸 宗婦의 눈물과 웃음
100년 전 巨商의 아흔아홉칸 종가... 스물넷에 시집와 종가 며느리로 살아
입 닫고 고개 숙인 인고의 삶... 누군가 붙여준 호 ‘雅堂’처럼
이제는 우아하고 당찬 맏며느리로 산다
1910년대 말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 살던 보성 선씨 참의공파 18세손 선영흥은 섬에서 나와 뭍으로 이주했다. "섬에서는 인재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찌감치 풍수가들을 보내 전국 명당을 훑게 했는데, 낙점한 곳이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하개리 땅이었다. 해산물 무역으로 부를 이룬 만석지기 거상(巨商)이라, 이주 행렬은 종가에 대물림하는 씨간장독을 비롯해 온갖 짐 쌓은 소달구지 수십 대가 장관을 이뤘다.
선영홍은 속리산에서 내려오는 삼가천 천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땅에 아흔아홉칸 집을 지었다. 1919년부터 2년 걸렸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이 있었고 방앗간과 마구간도 있었다. 선영홍의 아들 정훈은 서른세칸을 더 짓고 관선정(觀善亭)이라는 서당을 만들어 인재를 길렀다. 한학의 태두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이 관선정 출신이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이후 김정옥은 해마다 제사를 아홉 번 지내고, "왜?"라는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종부(宗婦)의 삶을 살게 되었다.
보은은 속리산을 품고 있다.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분쟁하던 전쟁터였다. 속리산이라는 큰 산을 끼고도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평탄한 충청 땅 지세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섬에 살던 거상(巨商)을 부르게 된 명당지처(明堂之處)도 그런 지질학적 연유가 있는 것이다.
시집을 오니 시부모와 시할머니가 반겼다. 김정옥이 말했다. "할머니께서는, 당신 삶을 처절하게 아시는지라, 나를 측은하게 여기고 예뻐하셨다. 나는 철부지처럼 규범을 어긴 적도 많았고."
어느 날 마을의 한 학교 교장선생님과 테니스를 쳤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감히 며느리가 시아버지 친구와 테니스를 쳐? 격분한 집안 어른들에게 시아버지가 반격했다. "건강해야 종부로 살 수 있다. 그러려면 운동을 해야 하니, 뭐라 마시라." 김정옥은 "당장 때려치우라는 말보다 열배는 더 무서웠다"고 했다. 바로 테니스를 그만뒀다. 여름이면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집안 손님을 맞는, 상상도 못했던 삶이 시작됐다.
선대가 이뤘던 거부(巨富)는 일제 때 이미 쇠락했다. 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진 집 한쪽에는 군부대가 들어섰다. 어느 해에는 돈이 떨어져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팔아 제사를 지낸 적도 있었다. 의무만 있고 자유는 없는 종부의 삶이었다. 1992년 김정옥이 선언했다. "이제 종가 며느리의 주권(主權)을 행사하겠어요."
사람이 살아야 종가가 산다는 말이었다. 1944년 일제가 폐쇄한 관선정 이름을 살려 고시원을 열었다. "인재를 찾아왔으니, 젊은이를 불러들여 그 맥을 잇는다." 경제가 해결되니 삶이 나아졌고, 주권을 행사하면서 고단했던 종부의 허리는 조금 펴졌다.
그렇게 주체적인 며느리가 되고도 멈추지 않는 일이 있으니, 장 담그기였다. 그녀가 말했다. "시집와서 닷새 동안 마을 잔치가 끝나니까 시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집안이 망한 다음에야 장 만드는 걸 그만두는 법이다. 장이란, 바로 그 집이다. 배워라."
선씨가의 장독대에는 대문이 있다. 금줄을 두른 독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대물림하는 씨간장독, 하나는 햇간장독이다. 20L 정도 들어가는 이 씨간장독에 간장이 5L 정도로 줄어들면 햇간장을 부어 섞는다. 세월 모를 아득한 옛날부터 선씨 종부들이 이어온 전통이다. 혹자는 그 세월이 400년이라고 했고 혹자는 350년이라고 했으나 상관없다. 시간을 초월한 종부들의 합작품임은 틀림없다.
해마다 정월 말일이면 가족이 장독대 앞에 모인다. 소반에 맑은 물 올려놓고 제를 올린다. 올해도 맛있는 장 만들게 해달라고. 연전에 그 씨간장 1L가 500만원에 팔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인고(忍苦)의 삶을 살며 종가를 잇는 그녀에게 누군가가 아당(雅堂)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우아하며, 당차다는 뜻이라고 했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무슨 복이 그리 많아서 이런 집에 살게 됐나. 그녀가 속으로 대답한다. 살아봐라.
지금 아당은 장을 만든다. 장(醬)이 소문나면서 씨간장을 조금씩 섞은 장을 제법 많이 만들게 되었다. 아당골이라 이름붙인 이 장들은 22세손인 아들 종완이 팔고 있다. 종완은 부여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보존과학을 공부한 뒤 집으로 들어왔다.
장을 본격적으로 담그면서 종부의 삶은 변했다. 눈물은 많이 사라지고 웃음은 늘었다. 그리고 다짐한다. 며느리가 오면 절대 자기 같은 삶은 안 살게 하겠다고. 어디 한두 며느리가 그런 다짐을 했으랴만, 선씨 가문 21세 종부의 맑은 웃음은 그 다짐이 퍽이나 굳다고 결론짓게 만들었다. 하늘 청명한 초겨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