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과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기행’(10월 3~10일)의 여정은 이렇듯 자작나무 숲과 시심(詩心)이 함께 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체호프·파스테르나크에게로 가는 길은 땅덩어리만큼이나 깊고도 넓은 러시아의 영혼 속을 헤매는 내면의 여행이었다. 누구라도 아마 수백 리 자작나무 숲에 들어서면 작가가 되고 철학자가 될지 모른다. 체호프가 자신의 희곡 ‘벚꽃 동산’과 ‘바냐 아저씨’ 끄트머리에 신음처럼 뱉어낸 ‘한세상이 지나가버렸어’라든가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해요’를 읊조리면서.
소설가 이문열, 시인 이병률, 러시아문학 전문가 정태언 박사가 이끈 기행단 40여 명의 발길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동서남북을 가로질렀다. 소련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혁명과 이념의 나라를 문학과 예술의 도저한 전통을 지닌 러시아로 재발견하는 순례길이었다.
체호프와 그의 아버지가 심었다는 나무들이 바람 속에 우수수 낙엽을 떨어뜨렸다. 작품을 구상하며 그가 즐겨 걸었다는 ‘체호프의 산책로’에 서자 비로소 희곡 ‘벚꽃 동산’의 여주인공 라네프스카야의 마음이 이해됐다. 불어나는 빚에 떠밀려 영지를 팔게 된 그는 다차(러시아식 목조 별장)를 지어 팔면 이득이 클 거라는 장사꾼의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이 가꾼 수만 그루의 벚나무에 차마 도끼질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체호프의 심정이었으리라. 하지만 희곡에서 라네프스카야는 팔아버린 영지에서 쿵쿵쿵 울려 퍼지는 도끼 소리를 들으며 마차를 타고 떠난다. 그 쓸쓸한 마무리조차 체호프의 정원에 오니 아름다운 여백이 된다.
다시 차를 달려 도착한 야스나야폴랴나, 톨스토이의 거대한 장원에서 인상 깊었던 건 그가 대하소설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다는 지하방이 아니었다. 1910년 10월 주치의를 데리고 가출해 죽음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으로 읽었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395쪽이 펼쳐져 있는 서재도 아니었다. 저택에서 20분쯤 걸어 나와 외진 숲 속 한 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있는 그의 무덤이 문학 기행단 가슴을 서늘하게 쓸어내렸다. 하늘을 이고 땅에 납작 엎드린 그 무덤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톨스토이의 사도들을 무릎 꿇린 ‘러시아의 영혼’을 웅변하고 있었다.
노자의 『도덕경』에 심취했다는 말년의 톨스토이는 무정부주의와 무저항주의를 넘어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놓았다. 레닌이 야스나야폴랴나에 와서 했다는 말, “톨스토이의 모든 것을 영구히 보존하라”는 한마디도 이곳에서야 실감이 났다.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한·러 문학의 밤’에서 이문열씨는 “내 문학수업의 시작이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될 때 만난 것도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체호프였고, 다시 나이를 더 먹고 외곬로 몰릴 때에도 이 ‘위대한 문학의 시대’를 일군 세 사람만이 내게 남았다”고 회고했다.
보드카 한 모금을 털어 넣은 듯 알싸한 문학의 향취가 러시아의 밤하늘 아래 기행단을 감싸고 돌았다.
모스크바=정재숙 선임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 러시아 문학기행에 동행했던 이병률 시인은 마지막 날 시를 한 편 생산했다. 7박8일의 여정이 낳은 시 ‘바람에게’는 시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보여준다.
바람에게 이병률
별에게 감히 말을 건 것을 용서해 다오
색깔을 잘못 사용한 죄를 씻어가 다오
말을 타고 달리는 구름이여
이 가을 하늘의 지붕이여
나를 심판해 다오
바람의 감정을, 혁명의 마디를 끊어다오
아침녘 황금빛으로 울먹이는 서리들을
모두 지워다오
나에게 있는 것들을 용서해 다오
내가 입을 옷까지도 내가 발설한 비밀까지도
다리를 건널 수 없게
붉은 열매를 먹을 수 없게 힘을 가져가 다오
부디 다시 태어나게 하거나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해다오
담장을 이념을 낙서들을 끊어다오
이 몸속의 황금을 빼내어 가다오
당신의 발자국이 찍힌 자작나무 허리들을 모두 베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