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불편 ? 현대식 리모델링 붐
부엌-안방 턱 없애고 욕실 바닥에 보일러 단열재 넣고 창호도 이중 삼중 …
`집이 반듯하니 애들도 예의 바르게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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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체부동 한옥에 세들어 사는 신현림 시인.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 다세대주택을 보러 다니다 가격이 너무 높아 포기하고 돌아가던 길에 우연히 아담한 한옥을 만났다. "집주인이 내부를 현대식으로 수리해 1년간 살았던 집이라 어렸을 적 살던 한옥보다 훨씬 살기가 좋아요. 아파트에 살 때와 달리 사람답게 산다는 느낌이 든답니다."
최근 신씨처럼 한옥에 푹 빠진 이들이 늘고 있다. 북촌의 한옥 값이 꿈틀댄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한옥 하면 아직도 '춥고 불편하다'는 인상이 강하긴 하다. 그러나 전통 양식을 살리면서 안팎을 현대식으로 고친 경우라면 어떨까. 문화재청이 기획하고 '새로운 한옥을 위한 건축인 모임'이 쓴 '한옥에 살어리랏다'(돌베개)를 들여다보니 한옥의 '유쾌한 변신'이 흥미롭다.
# "8학군에서 북촌으로 이사 왔어요"
서울 우면산 기슭의 아파트에 살던 조향순씨 부부는 1989년 세 아이들을 데리고 계동 한옥으로 이사 왔다. 유치원에 다니던 막내가 그려온 '우리 집'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게 계기였다. 네모진 유리창이 가득 찬 12층 아파트 중간에 빨간 칠을 해놓고 '○○아파트 나동 404호'라고 써놨던 것. 조씨 부부는 밤새워 토론을 거듭한 끝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곳이 18년간 정 붙여온 '능소헌'이다.
조씨의 한옥예찬을 들어보자. "마당에 면한 툇마루와 안채의 대청은 아이들과의 단란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장소다. 언젠가 집안 어른이 우리 아이들을 보고 예의 바르게 컸다고 칭찬하기에 '한옥에서 살다 보니 자연히 그리 된 것 같다'고 대답했다. 한옥의 창호(窓戶)들은 높이가 낮아 자연히 머리를 숙이며 드나들게 마련이다. 미닫이문도 힘주어 열려 하면 잘 열리지 않지만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열면 쉽게 열린다. 한옥에 살면 이러한 이치를 일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대지 90여 평 규모의 능소헌은 1930년대에 지은 집을 개조했다. 조씨 부부는 부엌의 바닥 높이를 올려 안방과의 차이를 없앴다. 또 부엌 뒤편을 허물어 안방과 부엌 사이를 긴 계단이 있는 일자형 통로로 연결했다. 통로 앞에는 안방에 딸린 화장실이 있고,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지하의 음악감상실로 연결된다. 한옥에도 지하공간을 둘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 "화장실 전망, 기가 막혀요"
서울 가회동에 있는 '취죽당'은 한옥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러모로 깼다. 도시형 한옥은 'ㄷ'자나 'ㅁ'자 같은 폐쇄형 구조인 경우가 많다. 취죽당도 문간에 들어서면 사랑채가 가로막는 구조였다. 대청에 앉아도 작은 마당 건너 사랑채가 버티고 있어 시야가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주인은 사랑채를 허는 대신 사랑채 일부를 마루로 만들어 양쪽의 시야를 틔웠다.
전체 면적이 20평 남짓이지만 화장실이 손님용을 포함, 두 개나 된다. 사랑채에 딸린 화장실 겸 욕실 바닥에는 도시가스로 작동되는 보일러를 깔았다. 이 화장실은 집 전체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 개축 과정에서 새로 낸 창문 너머로 인근 한옥들의 기와지붕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창에 유리 대신 창호지를 발랐지만 추위는 걱정 없다. 단열재를 충분히 쓰고 창호를 이중 삼중으로 단 덕분이다.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다락도 없애지 않고 놔뒀다. 안방과 부엌 양쪽에서 드나들 수 있게 해 편리하다.
# "북악산 물길 닮은 구조 살렸어요"
서울 팔판동에 자리 잡은 '삼호당'. 동네 이름의 '여덟 판서'가 나온 집이라 전해지는 이 고옥은 14가구가 세들어 사는 동안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이를 집주인과 건축가.목수가 '한옥을 살리자'는 데 의기투합해 중건(重建)에 나섰다.
장대석(축대를 쌓는 데 쓰는 돌)과 주춧돌을 빼고는 다 뜯어고쳤지만, 원래 있던 모습과 크기는 그대로 살렸다. 특히 행랑채가 안마당을 겹으로 감싸고 돌아 행랑채와의 사이에 좁은 골목이 만들어지는 독특한 포(包)자형 구조를 살려 눈에 띈다. 집주인이 이 모양새가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온 물길이나 지맥과 관련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화와 국화 등 '이군자(二君子)'를 모신 뜰을 보면 "한옥은 정신이 풍요로운 집"(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주인 내외와 아들 부부, 손자까지 모두 8명의 대가족이 한집살이를 하고 있다.
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