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람 사람] 사형수들의 친구로, 누나로, 어머니로 30년 [중앙일보] 기사

푸른물 2010. 10. 11. 18:23

사람 사람] 사형수들의 친구로, 누나로, 어머니로 30년 [중앙일보]

2005.06.08 05:03 입력 / 2005.06.09 10:53 수정

인연 담은 책 펴내고 유품전 여는 주부 김혜원씨

김혜원씨가 사형수들이 착용하는 빨간색 수인번호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수인번호 ‘58’의 주인공은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사형수가 됐던 김성만씨. 그는 나중에 무기로 감형된 뒤 감격에 겨워 수인번호를 뜯어내 김씨에게 건넸다. 신인섭 기자

사형수 박철웅이 투병 중이던 김씨의 딸에게 보낸 성탄카드 겉봉. 죄수복을 잘라서 만든 봉투에 실로 글씨를 수놓았다.

세면 수건의 올을 풀어 꼬아 만든 십자가 목걸이들. 20대 초반이었던 사형수 강순철이 만들어 김씨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1975년 10월 9일. 조간 신문들은 17명을 연쇄 살인한 김대두(당시 25세)의 검거 소식을 일제히 1면에 실었다. "세상에 이런 흉악범이 하필 당신과 같은 고향 사람일 게 뭐예요?" 마치 연쇄살인범과 동향인 게 중죄라도 되는 듯 몰아붙이는 김혜원씨에게 남편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럼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

이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김씨의 머릿속엔 악한 영혼이 회개도 하지 않고 죽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될까 하는 걱정이 맴돌았다. 그래서 무턱대고 '희대의 살인마'에게 편지를 썼다. "교도소에서 얼마나 추우세요?…지금이라도 뉘우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바랍니다….' 겉봉의 수신인란엔 우편번호도, 번지수도 없이 '서울구치소 김대두씨 앞'이라고만 적었다. 열흘 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날아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고 저주하는 저를 생각해주시다니…. 이 죄인으로 인해 무참히 피해를 본 영령들의 명복을 저승에서라도 빌겠습니다…."

그게 시작이었다. 4남매를 둔 주부 김씨가 사형수들의 친구이자 누나, 어머니로 나서게 된 것은. 교화위원이란 직함을 달고 그는 가족도 돌아보지 않는 사형수들의 대화 상대가 돼주고, 사식을 먹이고, 기도를 올려주었다. 따뜻한 보살핌 속에 사형수들은 누구랄 것 없이 새 사람으로 태어났고, 얼마 안가 죽음을 맞았다. 그렇게 교도소를 내 집처럼 드나드는 사이에 마흔이던 김씨는 어느덧 일흔이 됐다.

"'첫사랑'이었던 김대두가 사형장에서 삶을 마감한 뒤 하도 허무해 그만두려고 했어요. 어차피 죽을 사람들에게 뭐하러 이렇게 정을 주나 싶어서요. 그런데 얼마 후 꿈 속에 그가 환히 웃는 얼굴로 나타났어요.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구나…, 그런 확신이 들어 계속 봉사할 수 있었죠."

그간 김씨가 돌본 사형수 20여 명 중엔 골동품상 '금당' 주인 부부를 죽인 박철웅, 제자를 유괴.살해한 주영형 등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던 살인범들이 여럿 있다. 그런가 하면 정치범도 있고, 억울하게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쓴 이도 있다.

"정치범이나 누명 쓴 사람을 생각하면 사형제는 마땅히 폐지돼야죠. 설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사형 대신 종신형을 선고해 감옥 안에서나마 참회하고 사람답게 살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김씨는 최근 사형수들과 함께 한 30년 세월을 담은 책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도솔 刊)을 펴냈다. 그는 "범죄자들을 가두고 죽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교화시켜야만 우리 자녀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책 출간과 때를 맞춰 김씨가 그동안 사형수들로부터 받은 각종 유품의 전시회(8~14일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도 열린다.

신예리 기자 <shiny@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