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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맛] "집안 가득 달콤함… 그것은 엄마의 향기"신정선 기자 viole

푸른물 2010. 10. 9. 07:07

내 인생의 맛] "집안 가득 달콤함… 그것은 엄마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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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9.15 03:06

시인 정끝별과 팥칼국수
어머니는 팥국물 만드시고 언니·오빠·나는 칼국수 담당… 어렸을적 온 가족이 즐긴 '잔치'

각계 명사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간절한 맛을 풀어내는 '내 인생의 맛'. 열한 번째 주인공은 시인 정끝별입니다. 팥칼국수에 대한 추억을 나눈 인터뷰를 이야기하듯 독자들께 들려드립니다.

저희 집은 4남2녀 대가족이었답니다. 제가 막내예요. 저희 어머니는 명절은 물론 절기 때마다 특별한 먹을거리를 챙겨주셨어요. 여섯 남매가 되다 보니 일주일 전부터 음식을 준비하셨죠. 동지, 보름, 단오 때는 집에서 항상 '냄새'가 났어요. 무언가가 익어가는 냄새, 끓여지는 냄새, 삶아지는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면 그렇게나 행복했어요.

“이 맛이 어릴 때 저를 설레게 했죠.”정끝별 시인이 서초구의 한 음식점에서 방금 나온 팥칼국수의 면발을 들어 보였다. 추억이 살아 있는 음식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반짝인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냄새를 집 안 가득 풍기면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참 좋아했어요. 서양으로 치면 파티, 우리식으로 잔치가 주는 '흥성스러움'이 냄새로부터 스며 나왔지요. 시인 백석이 시 '국수'에서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게 흥성흥성 들뜨게 한다'고 말했던 흥성스러움이요.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사냥을 시작하는 장면부터 나오잖아요. 아이에게는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분위기부터가 설렘의 시작이지요.

옛날에는 고깃국의 기름진 냄새가 얼마나 귀했는지 몰라요. 떡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도 아이의 가슴을 꿈으로 부풀게 했지요. 거기에 팥이 들어가면 달콤한 냄새가 머릿속을 황홀하게 채웠어요. 지금이야 집집마다 밀폐돼 있지만 옛날에는 전부 열려 있었죠. 그러니까 어느 집에서 고깃국을 끓이면 저만치에서부터 냄새가 밀려와요. 밖에서 놀다가 고깃국 냄새를 어렴풋이 맡으면 집으로 달려갔죠. '저 냄새가 나는 곳이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다' 하면서요. 고깃국 집이 우리 집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그 행복감이란! 예전에 음식을 나눠 먹던 건 냄새를 피운 일종의 세금이었던 것 같아요. 옆집에서 냄새만 풍기고 말면 얼마나 야속했겠어요. 냄새와 함께 인정도 건너가는 거였죠.

저 어렸을 때는 설탕이나 초콜릿이 없었죠. 그 시절에 팥은 단맛을 즐기는 근원이었어요. 팥 음식 중에서도 팥칼국수는 '축제의 음식'이자 '놀이의 음식'이었어요. 팥을 삶고 으깨고 걸러내 팥국물을 내고, 밀가루를 반죽해 밀고 잘라 칼국수를 빚고, 그것을 다시 합쳐 큰 솥에 끓여내는 일은 손이 많이 가죠. 축제나 놀이처럼 온 가족이 함께하지 않고서는 만들어 먹기 어려운 음식이었죠. 다른 음식에는 팥이 귀해서 고물이나 시루 정도로 들어가는데, 국물 형태로 팥을 풍성하게 즐기는 드문 음식이기도 했고요.

저희 6남매 중에서도 저를 포함한 제일 아래 3남매가 특히 잘 어울렸어요. 놀이 반, 노동 반으로 함께 만들어 먹던 게 팥칼국수예요. 어머니는 팥국물을 만들고, 칼국수는 저희 몫이었죠. 셋이서 반죽하고 밀고 썰고 자르고, 그 재미에 콩닥콩닥 설레던 순간이 있었지요. 손가락 열 개가 꼼지락꼼지락하다 보면 풀풀대던 밀가루가 한 덩이로 엉겨붙곤 했어요. 셋이서 밀가루를 세 덩이로 나누어, 주무르고 때리고 다시 바꾸어서 주무르고 때리느라 용을 썼어요. 네살 위 언니는 홍두깨로, 한살 위 막내 오빠는 소주병으로, 저는 빨랫방망이로 무릎을 꿇고 앉아 밀가루를 뿌려가며 밀었지요. 저희끼리도 역할 분담이 착착 이뤄졌어요. 언니는 채를 썰고, 썬 뭉치에 밀가루를 뿌려가며 탈탈 너는 것은 제 몫이었어요. 그걸 채반에 예쁘게 담아 팥국물을 끓이고 계신 어머니에게 들고 가는 것은 막내 오빠 몫이었지요. 어린 삼 남매의 잔치이자 오감각 놀이였던 거죠.

막내 오빠가 가져간 칼국수는 10분이면 팥국물에 담겨 저희 앞으로 돌아왔죠. 상 위에 떡하니 놓인 그릇을 받아들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겨울이면 마당 화단에 쌓인 흰 눈에 팥죽그릇을 파묻어 두고 먹었어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식히려고요. 빨리 먹고 싶은데 그릇이 뜨겁잖아요. 하얀 눈에 놓인 사기그릇, 그 안의 팥국물은 유난히도 붉게 보였지요. 마당에 셋이 쪼그리고 앉아서 달게 달게 먹었지요. 두세 그릇은 뚝딱 비우곤 했어요. 한여름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끓이고 빚었어요. 빨리 먹으려고 커다란 양은그릇에 찬물을 받아와서 그 안에 두고 후루룩후루룩 먹었죠.

어머니는 팥을 소중히 여기셨어요. 붉은 팥은 피, 흰 쌀가루는 살이라고 하셨죠. 저희가 건강한 살과 피를 갖게 해달라고 비시면서 팥칼국수를 만들어 주셨어요. 까마득한 어린 시절, 뽀얀 밀가루 냄새와 달콤한 팥 냄새는 어머니 땅의 물씬한 흙냄새이자 살냄새였답니다.

●정끝별은…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시 부문에 '칼레의 바다' 외 6편의 시가 당선돼 등단했다. 현 명지대 국문과 교수.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2005) '와락'(2008) 등을 냈다. 2008년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일상의 언어를 탁월한 시적 언어로 탈바꿈시킨다는 평을 받는다. 시선집 '밥'(2007)에서 '성실한 밥, 아름다운 밥, 마음을 움직이는 밥, 영혼을 함포고복(含哺鼓腹)케 하는 밥맛'을 담은 여러 시를 소개했다.

●팥은… '陽'을 상징하는 곡물, 단백질·비타민 B1 풍부

팥은 양(陽)을 상징하는 곡물이다. 한자로 적두(赤豆)라 한다.

일년 중 밤이 가장 길어 음기(陰氣)가 특히 강하고 동시에 양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날인 동지(冬至)에는 붉은 곡물인 팥으로 죽을 쑤어 먹으며 태양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동짓날 팥죽을 먹는 풍습은 중국에서 유래했다. 조선 후기 김매순(金邁淳)이 쓴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는 "팥죽은 귀신을 몰아내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중국에서 비롯됐다"고 전했다. 6세기 초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는 '공공씨(共工氏)의 못난 아들이 동짓날 죽어 역질(疫疾) 귀신이 되었는데, 생전에 팥을 두려워했으므로 이날 팥죽을 쑤어 물리친다'고 설명했다. 중국 명대(明代)의 약학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도 귀신을 쫓는 팥의 기능을 강조했다.

달착지근한 팥칼국수는 전라도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일반 칼국수보다 만드는 법이 단순하고, 은근하면서 고소하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팥은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맛이 달면서 시고 독이 없는 작물'이라 나와 있다. 또한 '오래 먹으면 피부가 검어지면서 몸이 수척해진다. 술로 인한 갈증을 다스리고, 음주 후 두통과 주독을 푸는 작용이 있어 술로 인한 병증을 다스리는 양약(良藥)'이라고 했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이뇨작용을 돕는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사포닌 성분이 많고, 비타민 B1이 풍부해 피로해소에도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