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살인범에게 남편·아들 잃은 여성들의 제빵강좌 수강] 웃다가 울다가… 금방

푸른물 2010. 9. 30. 06:13

살인범에게 남편·아들 잃은 여성들의 제빵강좌 수강] 웃다가 울다가… 금방 "형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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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9.20 03:05 / 수정 : 2010.09.20 03:35

범죄 피해자 지원 시설 '스마일센터' 프로그램… 서로의 아픔 어루만져

"달걀을 팍팍 풀어주세요. 그러고 나서 설탕·소금·바닐라향을 골고루 넣어 섞어주세요. 역시 살림꾼들답게 잘들 하시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6일 서울 '스마일센터' 2층 강의실에서는 '도넛 만들기' 수업이 한창이었다. 테이블 위에 그릇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여성 4명이 강사의 말에 따라 열심히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다.

'스마일센터'는 법무부에서 지난 7월 문을 연 국내 최초의 범죄피해자 종합지원시설. 범죄 피해를 입었거나 가족이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 임시로 지낼 공간을 제공하고, 각종 치료·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6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스마일센터’에서 범죄피해자 가족 4명이 김포대 호텔조리과 정수경 교수(얼굴 보이는 사람 중 가운데)의 도움으로 도넛을 만들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살인범들에게 남편과 아들을 잃은 이들은 이달 초부터 제빵 강좌를 들으며 함께 상처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제빵 강좌는 이달 초부터 시작됐다. 이날 수강생 4명은 모두 살인범들에게 남편이나 아들을 잃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랑 얘기나 나누고 싶다"고 호소해온 여성들이다. 제빵 강좌는 김포대학 호텔조리과 정수경 교수의 자원 봉사로 진행되고 있다. 이날 수업이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수강생들은 금세 친해졌고, 수업 시간은 동네 미장원처럼 수다로 넘쳐났다.

"선선해지니 구수한 청국장 생각이 나네. 아이 아빠가 참 좋아했는데."

2년 전 노숙자가 계단에서 밀쳐 넘어지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A(67)씨가 입을 열자 B(57)씨가 맞장구를 쳤다.

"나한테 청국장을 기가 막히게 만드는 비법이 있어, 형님. 전자 대리점 앞에서 큼지막한 빈 박스 주워다가 소쿠리 넣고 콩 넣고 그 위에 못 입는 옷 삶아서 얹은 다음 옥상에서 이틀만 둬 봐. 기가 막히다니까요."

신나게 이야기하던 B씨가 "나 혼자 먹으려고 끓였나? 남편이랑 새끼 먹이려고 끓였지"라며 쓸쓸하게 웃었다. B씨의 남편은 택시운전을 하다 3년 전 택시강도를 만나 끔찍하게 살해됐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리려 반죽을 하던 막내 C(39)씨가 입을 열었다.

"근데 확실히 음식은 해먹는 것보다 얻어먹는 게 100배는 맛있어요. 나도 김치랑 된장 같은 건 친정 엄마가 다 해다 주거든요. 언니들도 딸들한텐 그러죠?" 수강생 가운데 나이는 가장 젊지만 C씨는 '범죄피해자' 경력으로 가장 선배다. C씨의 남편은 지난 2002년 술자리에서 시비 끝에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두 아들은 벌써 고등학생이 됐다.

도넛 반죽은 기름통에서 자글자글 익어갔고, 강의실에는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찼다. 도넛에 계핏가루와 설탕을 묻히고 있던 D(67)씨가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사람 중 가장 말이 없던 D씨다. "요즘은 딸들이 낫다지만, 아들이 키울 땐 속 썩여도 나중에 얼마나 듬직한데. 그나저나 다음 주가 추석인데…."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리자, A씨가 가만히 안아줬다. D씨는 3개월 전 만취한 사람의 칼부림에 외아들을 잃었다. 이들에게 추석은 아픈 날이다.

C씨가 말했다. "목욕탕에서 등 밀어줄 아빠가 없잖아요. 빡빡 밀어 달라고 목욕탕에 돈도 더 줬는데, 집에 와서 보니 꼬질꼬질 그대로예요. 하도 서러워서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B씨도 눈가가 빨개졌다. "난 집안 행사도, 친구들 모임도 안 가요. 밤에 잘 때 옆에서 아직도 남편 숨소리가 들려. 요즘 택시를 타고 내릴 땐 구석진 골목까지 가자고 안 해. 그 시간에 기사 양반이 돈을 벌어야지."

A씨도 "방 안에 걸어둔 남편 사진을 보면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 같다"며 울먹였다. "그 노숙자가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며 홧김에 앞에 가던 우리 남편을 밀쳐서 죽였어. 그렇게 갈 줄 알았으면, 그해 남편이 여행 가자고 할 때 갔어야 하는데."

수강생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던 정수경 교수의 눈가가 빨개졌다. "이렇게 웃다가 울다가 하면 시간이 금세 지나가버리니. 제가 오히려 이분들께 배우죠. 우리는 빵을 구우면서 슬픔을 나누고 희망을 만들어 간답니다."

수업이 끝나자 수강생들은 가족들에게 주기 위해 하트·별·초승달 모양의 도넛을 봉지에 예쁘게 포장한 뒤 "명절 잘 지내라"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수강생들에게 추석 소원을 물었더니 한결같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안 나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