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두식 논설위원
한국만큼 대형 뉴스들이 줄을 잇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한 탓에
의혹과 스캔들이 돌고 돈다…
인천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게 지난달 26일이었고, 열흘 만인 지난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사이 한국에선 총리 후보자와 장관 후보자 2명이 국회 청문회의 벽에 걸려 낙마(落馬)했다. 정권의 젊은 실세들이 이 정권에서 불법 사찰(査察)을 당했다고 폭로했고, 외교부 장관은 자신의 딸을 외교관으로 특채(特採)했다가 불명예 퇴진했다. 국내 2위 은행이 모(母)기업의 현직 사장을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는가 하면 북한 김정일이 석 달여 만에 중국을 다시 찾아갔고,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다른 나라에서는 1년에 한두 건 발생하기도 쉽지 않을 대형 뉴스들이 열흘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기에 비하면 기자가 머물렀던 워싱턴 DC 인근은 너무도 평온했다.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미국 TV가 사흘 넘게 생중계한 가장 큰 뉴스는 미국 동부 해안을 따라 북상한 태풍 얼(Earl) 소식이었다. 물론 워싱턴 일대에서도 한국계 미국인이 인질극을 벌이다 사살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 재개 같은 굵직한 뉴스들이 나왔다. 그러나 '한국형(型) 뉴스'들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굳이 '한국형 뉴스'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다른 나라의 뉴스들과 구분되는 뚜렷한 특징들 때문이다. 한국형 뉴스는 하나하나가 나라를 뒤흔들 정도의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다. 총리·장관 후보자 3명이 한꺼번에 사퇴하고, 곧이어 외교부 장관이 스캔들로 물러나는 일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졌다면 십중팔구 '정권의 위기'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과정과 시스템의 문제를 밝혀내고 책임을 묻고 개선책을 찾느라 한바탕 온 나라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총리·장관 후보자 3명이 사퇴하자 얼마 안 있어 이 문제는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아마 한 달쯤 뒤엔 총리·장관 후보자 3명이 한꺼번에 낙마했었다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질 것이다. 쉽게 들끓었다 쉽게 잊히는 것이 한국형 뉴스의 속성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갑작스레 등장한 '공정한 사회'라는 구호뿐이다.
한국형 뉴스는 반복적이다.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는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2000년 이후 계속 되풀이돼 온 문제다. 역대 정권들은 이런 일이 터지면 으레 엄격한 인사 검증과 제도 개선을 약속했었다. 그런데도 인사청문회가 열리면 이 문제들이 어김없이 다시 터져 나온다. 국민도 어느 정도 체념하게 됐고, 현 정부도 딱히 뚜렷한 대책이 없는 듯하다.
의혹의 실체와 책임 소재가 분명히 가려지는 적도 거의 없다. 여당 소장파 의원들이 국가기관으로부터 불법 사찰을 당했다는 주장은 정권이 진퇴(進退)를 걸고 규명해야 할 중대 사안이다. 민주주의의 존립과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를 한 쪽이 정치적·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사찰을 당했다는 측은 아무 증거도 내놓지 않고 있고, 사찰 배후로 지목된 측은 아예 못 들은 척하고 있다. 여당에서 불거진 불법 사찰 논란은 며칠 시끄럽다 사라지고, 그러다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희한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이런 한국형 뉴스의 자극적인 맛에 취해 있다 보면 '한국 밖 뉴스'나, 나라의 미래와 직결된 일들에 둔감해지기 쉽다. 김정일은 올 들어 두 번이나 중국을 찾아가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대(代)를 이은 조·중(朝·中) 우호관계'를 다짐했다. 정작 이 나라의 누구도 김·후 두 사람 간의 밀담(密談)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장관 후보자가 위장 전입을 몇 번 했고, 부동산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손금 보듯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나라의 명운(命運)이 걸린 사안에 대해서는 정보가 꽉 막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에 자주 가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무엇 하나 분명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뉴스가 뉴스를 밀어내고, 앞선 스캔들이 뒤따르는 스캔들에 자리를 내주면서 비슷한 유형의 의혹과 논란이 되풀이되는 게 한국형 뉴스의 순환 구조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 총리·장관 후보자의 위장 전입과 불법·탈법 논란이 또 등장하고, 여당 의원 사찰 의혹이 다시 고개를 들고, 북·중 동맹 앞에 우리 외교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크다. 한국형 뉴스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