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술국치 100년… 당시 '자결 순국' 인사 후손들이 맞은 8·29양승식 기자 y

푸른물 2010. 9. 3. 08:15

경술국치 100년… 당시 '자결 순국' 인사 후손들이 맞은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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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8.30 03:00 / 수정 : 2010.08.31 07:53

"나라잃은 백성이 살 길은… 가르침 생생" 강직했던 조부 뜻따라 일본글 안배워 핍박받아
"누구나 알던 황현 선생, 지금은 시험문제로나…"

"조부(祖父)께선 '왕족(王族)으로서 백성 볼 낯이 없다'며 괴로워하다 자결(自決)하셨다고 합니다."

2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에서 만난 이해선(79)씨는 조부인 미석(渼石) 이재윤(李載允) 선생의 초상화를 보며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6·25전쟁 때 조부의 영정(影幀)을 잃어버려 집안 어른들이 급히 그렸다는 손바닥만 한 초상화였다. 이씨의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매가 초상화 속 조부와 닮았다.

나라를 잃은 설움에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의 후손들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랑스러운 조상들을 기리고 있다. 조부(祖父)인 미석 이재윤 선생의 초상화를 액자에 넣어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해선(사진 위)씨와 매천 황현 선생이 자결(自決)하기 전 쓴 절명시를 손에 들고 있는 손자 황용수씨.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씨의 조부는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강제로 우리 국권을 빼앗은 지 1년 뒤인 1911년 7월 집안 서까래에 목을 매 자결했다. 조부 이재윤 선생은 고종황제의 6촌뻘 되는 종척(宗戚)이자 의병장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 체결되자 친일파를 처단할 것을 상소했고, 다음해 경기도에서 의병 300여명을 모집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당시 청나라 실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항일(抗日)구국운동을 원조해달라고 호소하러 압록강을 건넜다. 집안 재산을 털어 마련한 교섭자금을 청나라 당국자들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거간꾼들이 속속 돈을 갖고 달아나 조부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씨는 "조부는 한일병합 뒤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이미 죽음을 결심한 듯한 모습이었다고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는 "조부는 평소 '왕족이라는 사람들이 일본 왕에게 작위를 받는 모습이 백성에게 너무나도 죄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조부는 어느 날 집안에 아무도 없는 사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한 조선 후기의 유학자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의 후손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29일 오후 서울 송파구 가락동 자택에서 만난 손자 황용수(87)씨는 조부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다. 어렵게 입을 뗀 황씨는 "아버지와 어른들로부터 조부는 매우 강직했던 분이라고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황씨는 "예전에는 '황현 손자'라고 하면 누구나 알았는데, 지금은 절명시나 매천야록을 학생들 시험문제에 나오는 것쯤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황씨 집 거실에는 액자에 담긴 절명시 복사본이 장식장 위에 놓여 있었다.

지난 12일에는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소송(小松) 정재건(鄭在健) 선생이 자결할 때 사용한 '절의검'과 당시 작성한 '유서'가 공개됐다. 그의 증손자 정천원(54)씨는 "증조부는 돌아가시기 전 선산에 성묘하고 집에 들어와 갑자기 닭을 잡으라고 하셨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증조부께서 닭요리를 점심으로 드시고는 '나라 없는 백성이 사는 길은 오로지 주경야독(晝耕夜讀)뿐이니 비장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방 안에 들어가셨다고 한다"며 "집안 식구들이 기척이 없어 방에 들어가 보니 증조부는 칼로 목을 8번이나 찌른 채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옆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망한 나라의 신하로서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고 나는 맹세코 메이지(明治)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므로 9월 4일 칼에 엎드려 죽노라"고 적혀 있었다. 정씨의 집안은 증조부가 자결한 뒤 집 앞에 헌병들이 진을 치며 온갖 핍박을 다 해 풍비박산 났다. "절대 신학문(일본 글)을 배우지 마라"는 증조부 유언에 따라 소송의 후손 중 제대로 배운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29일 오전 10시쯤 서울 종로구 종로2가동 탑골공원 3·1 독립선언기념비 앞에서 열린 한일 강제병합 100년 행사에는 '자결 순국' 후손 중 이강세(64)씨가 유일하게 참석했다. 폭우가 내린 이날 이씨는 "할아버지께서 자결하시던 날 '산소에 가려 하니 과도를 준비하라'고 한 뒤 의연히 떠나셨다고 들었다"며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씨의 조부 청광(淸狂) 이근주(李根周) 선생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홍주(홍성군의 옛 지명)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는 그해 10월 부친 묘 앞에 제상을 차려놓은 채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 후 이씨의 가문도 일제로부터 탄압받았다. "압수해 간 고인의 기록을 돌려달라"고 홍성경찰서에 탄원했지만 소용없었고 집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이씨의 아버지는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농업 선생님이 나를 두고 '열사의 손자'라고 불러주셨던 당시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조부(祖父)인 미석 이재윤 선생의 초상화를 액자에 넣어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해선씨. 조부 이재윤 선생은 고종황제의 6촌뻘 되는 종척(宗戚)이자 의병장이었다./이태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