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람과 이야기] 64세 대학 기숙사 왕언니 "봉사하려고 배워요"천안=김형원

푸른물 2010. 9. 10. 07:13

사람과 이야기] 64세 대학 기숙사 왕언니 "봉사하려고 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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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9.04 03:01 / 수정 : 2010.09.04 09:14

남서울대 다니는 조경희씨… 집안사정으로 高3때 중퇴, 45년 만에 학교 문턱 밟아
세상 돕고싶은 생각에 도전, 검정고시·대학 잇달아 합격… 학생들 "언니는 우리의 멘토"

지난 2일 오전 9시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남서울대학교 지식정보관 내 카페 구석에서 두꺼운 안경을 쓴 조경희(64)씨가 손녀뻘 여학생 3명과 수다를 떨며 웃음꽃을 피웠다.

"얘, 이 과목은 1주일 2시간 수강에 겨우 1학점만 준다니 너무하지 않니?" 조씨가 영어교재를 펴보이며 말하자 최초이(19)씨가 "언니, 맞아요"라고 맞장구쳤다. 조씨는 기숙사 프린트에서 뽑은 '영어회화' 과목 수업계획표를 보며 수업 일정을 꼼꼼히 확인했다.

조경희씨가 1일 오후 충남 천안 남서울대 도서관에서 같은 과 동기인 김진실(왼쪽), 김미경(가운데)씨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뒤늦게 공부한 조씨는 올해 64세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조씨는 환갑을 두 해나 넘긴 지난해 만학도(晩學徒) 전형으로 이 대학에 합격한 '여대생'이다. 자기 또래 노인들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해 노인복지학과에 지원했다. 조씨 지도교수 양정민(39) 교수는 "항상 맨 앞 자리에 앉아서 강의내용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적는 성실한 학생"이라고 칭찬했다.

조씨는 입학 첫해부터 올 1학기까지 3학기 동안 한 번도 장학금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우등생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아파트에서 천안시 학교로 통학하던 조씨는 1학년 2학기인 작년 가을 아예 기숙사에 들어갔다. 조씨는 09학번 동기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한다. 조씨 동기생인 전예지(20)씨는 "열심히 공부하는 언니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제가 먼저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면서 "처음엔 '할머니'라고 했지만 공부하면서부터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조씨는 09학번 동기생 사이에 '왕언니'로 통한다. 같은 과 동기들은 "왕언니는 우리의 영원한 멘토"라고 입을 모았다. 연애 상담을 자주 한다는 김진실(19)씨는 "언니가 '결혼 전까지는 세상 모든 남자가 너희 것'이라며 '어장(漁場·남학생들이란 뜻) 관리'를 잘하라는 조언도 해주셨다"며 웃었다. 조씨는 "동기들이 17살인 손녀보다 두세 살 위밖에 안 된다"며 "얘들은 바라만 봐도 그저 귀엽고 좋다"며 동기들 손을 잡았다.

조씨가 학교 문턱을 다시 밟은 것은 45년 만이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학비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5년 쫓겨나다시피 학교를 중퇴했다. 그 후 동갑내기 남편을 만나 '먹고 사느라' 공부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고생 끝에 19.8㎡(약 6평)짜리 집을 마련했지만, 그 뒤는 자식들 공부시키기에 바빴다. 입시를 앞둔 아이들 뒷바라지에 같이 밤을 지새웠고 없는 살림을 쪼개 학원도 보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1995년 친정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곧바로 친정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는 우환(憂患)이 겹쳤다. 조씨는 친정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서 대소변을 받아냈다. 설상가상 2001년엔 남편마저 쓰러졌다. 조씨는 "'퇴근한 남편에게 '오늘은 술 먹지 않아 대견하네요'라고 말하며 돌아선 순간 남편이 풀썩 쓰러졌다"고 했다. 남편은 13일 동안 병원에서 한마디 말도 못하다가 세상을 등졌다. 그 뒤 가정을 꾸린 자녀들에게 짐이 되기 싫었던 조씨는 중풍·치매를 앓는 친정어머니와 단둘이 지냈다. 5년 전에는 친정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이젠 나 혼자구나, 훨훨 날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조씨는 3년 동안 여행만 다녔다. 터키에 갔다가 문득 '내가 뭐 하고 있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어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도전했다. 조씨는 "얼렁뚱땅 (대학에) 들어오긴 했는데 주변 젊은이들에게 노인 냄새가 날까 봐, 늙은이라고 괜한 신경 쓸까 봐 항상 걱정"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옷가지와 책, 컴퓨터를 들고 기숙사에 다시 들어간 조씨는 "평생 가족들에게 밥만 지어주다가 이제 남이 지어주는 밥을 먹으니까 기숙사가 좋다"며 웃었다. 조씨는 도서관으로 가며 "이대로 내가 졸업하면 예순 일곱이우. 그때부터 내 또래들을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부지런히 공부해야지"라고 말했다.

조경희씨가 천안 남서울대 도서관에서 같은 과 동기생들과 함께 활짝웃고 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뒤늦게 공부한 조씨는 올해 64세다. 신현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