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당했던 경찰들
"20명이 싸고 무장해제 한 남자가 쇠파이프로… 지금도 그 얼굴 기억나"
"골수 시위꾼 다 보여… 복수하고 싶은 심정 경찰이니까 참았다"
2년 전 촛불 문화제로 시작됐던 시위는 5월 하순 들어 폭력성을 띠면서 5월 24일 첫 경찰 부상자(11명)가 나왔다. 시위는 갈수록 과격해졌고, 6월 말에는 쇠파이프로 맞아 전신 타박상을 입거나 뇌진탕을 당한 전·의경들이 속출했다.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총집결 지침을 내린 6월 28일, 1만5000명이 서울 태평로 전(全) 차로를 점거하고 집회를 벌였다. 6000여명의 시위대 중 일부는 쇠파이프를 휘둘러 경찰 차량을 부쉈고, 인근 빌딩 소화전과 소방호스를 이용한 '사제(私製) 물대포'를 경찰에 쏘아대며 세종로 진출을 시도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3000여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공격을 계속했다. 해산 작전에 투입된 306중대와 50중대 대원들은 시위대에 순식간에 '돌돌말이'로 포위돼 쇠파이프와 돌, 망치, 의자 등으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70여명의 경찰 대원이 실신하거나 피를 흘렸지만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이날 하루 동안만 166명의 경찰이 다쳤다.
- ▲ 2008년 6월 28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벌어진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도중 한 전경이 시위대에게 폭행당하고 있다. /연합뉴스
50중대 중대 일경이던 하덕호(22)씨는 그날 프레스센터 앞에서 고립된 채 시위대에 집중 폭행당해 3개월여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씨는 20여명 시위대에 둘러싸여 '무장해제'당하고 무방비로 두들겨 맞던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그 공포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주먹과 발이 사정없이 가슴과 옆구리로 파고들었죠. 머리만 안 맞으려 발버둥쳤습니다. 다행히 정신을 잃지 않아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사람의 얼굴을 또렷이 봤습니다. 젊은 사람이었죠. 지금도 그 얼굴이 생각납니다."
그날 이후 하씨는 "꿈에 나오는 '그 얼굴들' 때문에 새벽녘이면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곤 한다"고 말했다. 경남 김해의 전자제품 조립공장에서 일하는 하씨는 "지금도 TV에서 2008년 촛불시위 장면이 나오면 식은땀이 난다"며 "당시를 잊으려 노력 중"이라고 했다.
중대원 80여명을 이끌고 태평로에 나섰다가 시위대가 던진 투척물에 눈을 맞아 안와골절상을 입은 당시 306중대 박영철(35) 경사는 "경찰 제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참았지, 민간인 신분이었다면 사적(私的)으로 복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1999년 경찰에 들어와 경비 업무만 10년째라는 박 경사는 "거침없이 보란 듯 폭력을 휘두르며 거리를 누비는 골수 시위꾼이 누구인지 훤히 알게 됐다"고 했다. "2002년 효순·미선이 반미 집회, 평택범대위,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그리고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이름만 바뀔 뿐 계속됐습니다."
박 경사는 "대한민국을 무법천지로 만드는 세력 앞에서 인내하고 싶지 않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는다"고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106일간 이어졌던 촛불시위 당시 경비·진압에 동원된 경찰력은 7606중대, 연인원 68만4540명으로, 부상자는 501명(중상 100명, 경상 401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