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5·18민주화운동 30주년] ‘폭도’ 멍에 벗고 명예는 되찾았지만 아픔은 아

푸른물 2010. 5. 19. 07:42

5·18민주화운동 30주년] ‘폭도’ 멍에 벗고 명예는 되찾았지만 아픔은 아직도…

 
2010-05-14 03:00 2010-05-14 09:22 여성 | 남성
계엄군 발포에 맞선 시민들…광주시 “300여명 희생”
‘민주화 운동’ 승격됐지만 발포책임자 등 여전히 미궁



 



1980년 5월 29일경 광주 북구 망월동에서 진행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합동장례식에서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할머니에게 안긴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린아이. 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김녕만 씨는 “이 사진이 5·18 당시 촬영한 1000여 장의 사진 중 가장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김녕만 씨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사는 데이비드 돌린저 씨(57)는 17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서 외신기자들에게 참상을 알렸던 그는 “죽으면 유골이나마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다.

정수만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장(64)은 5·18 당시 광주에서 인쇄업체를 운영했다. 1980년 6월 2일 군 사격장에서 총에 맞아 가매장된 둘째 동생(31)의 주검을 발견하면서 ‘투사’로 바뀌었다. 이들이 경험한 5·18은 불과 열흘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의 아픔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저항의 시작

1980년 5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10·26사태로 유신체제가 무너진 후 억눌렸던 민주화 욕구가 분출된 것. 민주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전격 체포한 데 이어 다음 해 5월 17일 비상계엄령 적용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전국 대학 학생회 간부 등 2700명이 연행됐다. 전남대 사학과 최영태 교수는 “계엄령으로 전국이 움츠러들었으나 광주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지는 등 저항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눔과 희생의 10일


공수특전단을 앞세운 계엄군은 18일 광주 북구 용봉동 전남대 정문 앞에서 대학생들을 과잉 진압했다. 19일 계엄군은 광주 도심을 차단하기 위해 금남로를 봉쇄했지만 시민들이 늘어나 실패했다. 이날 첫 발포가 이뤄져 사망자가 속출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빠져나가자 시민들은 무장했다. 고립된 상황에서도 나눔과 희생으로 시민들이 뭉친 ‘광주 공동체’가 생겼다. 하지만 계엄군이 27일 전남도청 ‘최후의 항쟁’을 진압하면서 5·18은 10일 만에 막을 내린다. 광주시는 “5·18 당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가 231명, 부상 후유증으로 나중에 숨진 사람이 1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 역사의 단죄

5·18 이후 광주시민들은 신군부에 맞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을 요구했다. 대학생들은 분신까지 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 끝나고 6·29선언이 나왔다.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가 진행돼 그동안 은폐됐던 5·18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정부는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을 재판정에 세웠다. 1997년 4월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 노 전 대통령은 17년 형이 확정됐으나 8개월 뒤 사면됐다. 정부는 그해부터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해 추모제를 열고 있다. 5·18기념재단 이기봉 총무팀장은 “5·18 발포책임자 등에 대한 진실규명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지적했다.

○ ‘최후 항쟁지’에서 피어나는 문화의 꽃


현재 전남도청 터에서는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건설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2006년 12월 발표된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조성 종합계획’에 따르면 광주는 문화를 매개로 아시아 등 세계 각국 인사들이 교류 소통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창의적인 용기(Melting Pot)’로 탈바꿈한다. 전남대 불어불문학과 류재한 교수는 “광주와 광주시민의 정체성인 5·18 정신을 ‘아시아 평화예술도시’ 속에 재현해 냄으로써 광주만의 브랜드를 살려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김권 기자 goqud@donga.com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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