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병풍 - 김수영 (1921 ~ 1967)

푸른물 2010. 5. 8. 10:18

병풍 - 김수영 (1921 ~ 1967)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의 전면 같은 너의 얼굴 우에

용이 있고 낙일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을 비추는 것이었다


상가(喪家)의 관 앞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인 듯 병풍이 세워져 있다. 주검을 가린 병풍은 살아있는 이들에겐 넘어설 수 없는 절벽처럼 우뚝하다. 죽은 자에게 애도와 추모를 바쳐야 하는 산 자들의 현실과는 상관없이, 병풍은 산수화를 펼쳐 죽음조차 관념일 뿐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며 삶에서의 냉정을 요구한다.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항상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하이데거(六七翁海士)’였던가. <김명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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