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 - 김수영 (1921 ~ 1967)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의 전면 같은 너의 얼굴 우에
용이 있고 낙일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을 비추는 것이었다
상가(喪家)의 관 앞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인 듯 병풍이 세워져 있다. 주검을 가린 병풍은 살아있는 이들에겐 넘어설 수 없는 절벽처럼 우뚝하다. 죽은 자에게 애도와 추모를 바쳐야 하는 산 자들의 현실과는 상관없이, 병풍은 산수화를 펼쳐 죽음조차 관념일 뿐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며 삶에서의 냉정을 요구한다.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항상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하이데거(六七翁海士)’였던가. <김명인·시인>
'시가 있는 아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으로 띄우는 편지 -고두현(1963∼ ) (0) | 2010.05.08 |
---|---|
5월 (0) | 2010.05.08 |
실연 - 송찬호(1959~ ) (0) | 2010.05.08 |
세상의 나무들 - 정현종(1939~ ) (0) | 2010.05.08 |
별을 보며 - 이성선(1941 ~ 2001) (0) | 2010.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