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어르신들의 '로맨스'가 활짝
실버바리스타 직접 운영, 여자친구에 아낌없이 쏴… 새로운 메뉴 속속 등장
지난 23일 오전 11시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중원노인종합복지관. 1층 한편에 있는 카페 주방에서 이만자(67)씨가 커피 그라인더(분쇄기)와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전업주부로 최근까지 손주를 키워온 이씨는 이달 초부터 즉석에서 커피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주는 '바리스타(barista)'로 변신했다. 잠시 앉아 쉴 틈도 없이 원두, 우유, 캐러멜 시럽, 유자가 담긴 병, 물주전자 등을 들었다 놓으며 일하던 이씨는 "아침에 갈 곳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 모르는 걸 배운다는 것, 배운 것을 활용해 다른 사람을 대접한다는 것이 주는 느낌 덕분에 힘든 줄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이씨가 일하는 곳은 지난 10일 문을 연 카페 '지음(知音·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이다. 복지관 각 층마다 어르신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야외 휴게실이 있지만, 차분하게 앉아 대화를 나눌 만한 곳은 없었다. '지음'은 그런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실버 바리스타들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이다.
◆60~70대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카페 '지음'
'지음'에서 커피를 만드는 이들은 복지관을 이용하는 60~74세 '어르신' 14명이다. 이씨를 포함해 '1기 실버 바리스타 카페 운영단'으로 선발된 이들은 작년 12월부터 3개월 동안 스타벅스 코리아의 지원을 받아 커피만들기 이론과 실습 교육을 받았다. 개점 후 근무표를 만들어 월~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오전과 오후 2개조 2명씩 카페에 나와 커피색 와이셔츠와 짙은 빨강 앞치마를 걸치고 또래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원두 갈기, 우유로 거품내기, 생강차 타기, 컵 씻기 등 카페의 모든 일이 이들의 몫이다.
- ▲ 지난 23일 오전 중원노인종합복지관 카페‘지음’에서 이만자씨(왼쪽)가 이명혜씨와 함께 카페모카를 만들고 있다. 60~70대 실버 바리스타들이 운영하는 카페‘지음’은 지난 10일 개점했다. / 이석호 기자
중원노인종합복지관 측은 은퇴 후 재취업을 희망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실버 바리스타' 과정을 도입하기로 하고 모집 공고를 냈다. 생각보다 많은 54명의 어르신이 지원했다. 복지관은 개별 면접을 통해 교육대상자를 뽑았다. 처음 하는 사업인 만큼 일에 대한 열의와 소득 정도, 서비스업 종사 경험을 고려했다. 일하는 보람과 함께 용돈으로 이들이 받는 월급은 8만~10만원 정도이다.
간호사로 일하다 4년 전 은퇴한 이명혜(69)씨는 "20년 넘게 취미로 봉산탈춤을 배운 덕에 4~5시간 동안 서서 일해도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다"며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바둑·장기 두던 곳에서 화사한 커피전문점으로
복지관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은 새로 생긴 카페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히 오랜만에 복지관에 들르신 할아버지들은 투명 유리문 밖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 하는 곳인가…' 하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카페 안을 들여다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지음'이 위치한 곳은 바둑과 장기를 두는 '대국(對局)터'였다. 바둑 한판을 두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할아버지들만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 '옛 대국터'는 창문엔 분홍색 블라인드가 쳐지고 연둣빛 벽면으로 둘러싸인 화사한 곳으로 변화했다. 천장엔 샹들리에 모양의 전등이 설치됐고, 벽면에 LCD TV도 걸렸다. 이만자씨는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 줄 알았다'는 분들도 한번 이용한 뒤로 단골이 되곤 한다"고 했다.
아직은 "여사님, 커피 한잔 줘"라는 어르신이 많지만, 메뉴도 다양하게 갖췄다. 카푸치노(1500원)나 캐러멜 마키아토(1700원)를 주문하는 '센스있는' 어르신도 종종 있다. 나이대를 고려해 생강차나 대추차 등 차(茶) 종류도 마련됐다. 아직 개시는 안 됐지만, 계란 동동 쌍화차도 메뉴판에 적혔다. 일단 가격(5000원)과 함께 메뉴에 올려놓고 손님들이 얼마나 찾는지 파악하는 중이라고 한다.
김기완 사회복지사는 "복지관 강좌가 끝나고 여자친구와 함께 들르셔서 커피 한 잔을 쏘고 가시는 할아버지들도 많다"며 "다방에서 일반 차(茶)를 마시는 것보다 (여자친구에게) 더 멋지게 보이는 면이 있다고들 하신다"고 말했다.
중원노인종합복지관은 이번 카페 개점 경험을 바탕으로 어르신들의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과 재취업을 지원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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