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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옷 차림의 안중근, 죽음을 달관한 그의 눈빛 [중앙일보] 기사

푸른물 2010. 1. 27. 13:04

명주옷 차림의 안중근, 죽음을 달관한 그의 눈빛 [중앙일보]

2010.01.26 03:10 입력 / 2010.01.26 08:55 수정

당시 뤼순 형무소장 편지로 재구성한 의사의 마지막 옥중 생활

1910년 3월 26일 촬영된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지금까지 알려진 사진이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며 흐릿했던 것과 달리 화질이 섬세하다.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이 사진을 최근 새로 찍어와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전시한다. 안중근 의사의 장엄한 최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듯하다. [춘천MBC 제공]
순국 100돌을 맞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는 의연하고 장엄했다. 순국 직전 찍은 사진(일본 국회도서관 소장)을 보자. 고국의 어머니가 지어 보낸 명주옷으로 갈아입은 그의 얼굴에서 사형을 앞둔 이의 초조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만주일일신문’(1910년 2월 23일자) 보도를 보면, 안중근은 입감될 당시 14관 400양(54.5㎏)이었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이후 14관 940양(56.5㎏)으로 체중이 2㎏이나 늘었다. 만주일일신문은 ‘특이한 일’이라고 보도했다(신운용 지음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참조).

안중근의 삶과 사상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운용 박사는 “대개 사형선고를 받은 후엔 불안감으로 몸무게가 현저하게 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임에 비추어볼 때 안중근 의사의 경우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심리상태가 안정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안중근의 비범한 담대함은 이번에 실물 원본이 공개된 뤼순 감옥 구리하라 전옥(형무소장급 직위)의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구리하라가 조선통감부의 사카이 경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중근 의사 최후의 면모를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순국 직전까지 안중근의 가슴 속에는 미완성으로 끝난 저서 『동양평화론』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편지는 1910년 3월 19일에 쓰였다. 안 의사가 순국(3월 26일)하기 일주일 전이다. 편지에는 안 의사 최후를 유추해볼 수 있는 상황이 적혀 있다. 구리하라는 안 의사에게 감옥 생활의 편의를 제공해준 인물이다. 안 의사가 비교적 좋게 평한 일본인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조선통감부 소속 사카이 경시(총경급 직위)는 뤼순 감옥에 파견돼 안중근 의사를 12회 이상 신문한 바 있다. 일본의 고위 경찰 간부 사이의 딱딱한 업무 보고일 수도 있지만, 그런 문건 속에서조차 안중근의 면모는 축소되지 않는 것이다.

안 의사에게 사형이 언도된 것은 1910년 2월 14일이었다. 사형 언도 3일 후 안중근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와 면회한다.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당초 히라이시는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안중근은 상고도 포기했다. 안중근 최후의 모습은 『동양평화론』 완성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생사를 이미 초월한 모습으로 여겨진다. 상고를 포기한 데는 “깨끗이 죽음을 맞이하라”는 어머니 조 마리아의 전언도 크게 작용했다. 두 동생이 어머니 말씀을 전했다.

안 의사는 3월 15일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탈고한다. 곧 이어 『동양평화론』 집필에 착수했다. 하지만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예정된 사형을 15일 연기해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대목과 관련 구리하라의 편지에서 주목되는 구절은 이것이다.

“『동양평화론』도 쓰기 시작하여 현재 서론이 끝났다. (…) 본인은 철저하게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원하고, 사후에 반드시 빛을 볼 것으로 믿기 때문에 얼마 전 논문 저술을 이유로 사형의 집행을 15일 정도 연기될 수 있도록 탄원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동양평화론』의 완성은 바라기 어려울 것 같다.”

구리하라가 볼 때, 안중근은 철저하게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원하고 있었으며 사후에 반드시 빛을 볼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00년이 지난 오늘 동아시아공동체 담론의 원조이자 유럽공동체 탄생보다도 70년 전에 제시한 평화 구상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안 의사는 침략과 지배가 아닌 평화와 상생의 동아시아를 희구했었다.

안중근의 최후와 관련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감옥에서 쓴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이다. 유묵들은 모두 사형이 언도된 2월 14일 이후 쓰였다. 그것도 모두 일본인의 요청에 의해 쓰인 것이었다. 상고도 포기하고 죽음을 앞둔 31세의 ‘장부 안중근’의 필체는 흔들림이 없다. 동양평화의 정신이 잘 표현된 유묵으로는 다음의 시가 손꼽힌다.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캄캄하다(東洋大勢思杳玄)/ 뜻 있는 사나이 어찌 편히 잠들겠는가(有志男兒豈安眠)/ 평화정국 못 이루었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和局未成猶慷慨)/ 침략정책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련하다(政略不改眞可憐).”

이 시는 구리하라 편지의 수신인 사카이에게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25일 사카이 경시가 『동양평화론』의 미완을 애석히 여겨 안 의사에게 결론만이라도 써주기를 요청하자 쓴 시라는 것이다.

구리하라의 편지 보고서 원본은 25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시작되는 ‘안중근 유묵전’ 연장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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