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림 전(前) 청주대 교수
음악은 만들고 연주하는 데서 시작하고, 듣는 데서 끝이 난다. 음악 애호가는 공연 전단과 음반 속지에는 이름 한줄 나오지 않지만 음악을 완성시키는 사람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음악 애호가들이 말하는 '나와 음악'을 듣는다.안동림(77) 전 청주대 교수(영문학)는 동양고전인 〈장자(莊子)〉 〈벽암록(碧巖錄)〉의 번역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정작 사랑하는 직함은 '음악 애호가'다. 그가 명동 음반 가게에 출현하면, 음반 사냥에 열 올리던 후배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는 최고 애호가로 꼽힌다.
안씨는 "나는 음악 전문가가 아니다. 비평가는 더욱 아니다. 그저 애호가일 뿐"이라지만, 그가 1988년 출간한 1500여 쪽 분량의 《이 한 장의 명반》은 재판과 개정을 거듭하며 10만권 이상 팔려나갔다. 지난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인기를 얻자, 이 스테디셀러의 판매량도 더불어 급증했다. "바이러스의 균에 옮아서 덕을 본 거지." 조용하면서도 퉁명스러운 그의 목소리에는 변함이 없다.
안동림씨의 취향에는 첨단과 복고가 공존한다. 한편으로는 'LP는 판을 넘기는 것이 귀찮고, CD는 넣었다 빼는 것이 귀찮아서' 여느 젊은이처럼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20여년 전 일본 출장 길에 아들에게 게임기를 선물로 사왔다가 인연이 되어 지금도 볼링과 테니스 게임을 즐긴다. "대학 연구실에서도 매일 게임만 했다. 요새 아이들도 지나치지만 않으면 오히려 두뇌 개발에 좋다"고 말할 정도로 '전자 오락 예찬론자'다.
- 안동림 전 청주대 교수가 애장 음반으로 꼽은 바흐의〈푸가의 기법〉.“ 라디오에서 들은 뒤 10년간 찾아 헤매다가 명동 음반가게 한구석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있는 이 음반을 찾았다”고 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하지만 좋아하는 작곡가는 모차르트, 흠모하는 지휘자는 20세기 초 베를린 필을 이끌었던 푸르트벵글러(1886~1954)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예전에는 녹음 시간이 짧아서 판을 몇 번씩 갈아 끼워가며 불편하게 음악을 들어야 했지. 지금은 소파에 누워 리모컨 하나로 재생에 반복까지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진지함이 사라진 건 아닌지 아쉬움도 들어."
안동림씨는 평양에서 3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혈혈단신으로 내려왔다. 목재상이었던 집안에는 낡은 유성기가 있었고, 그는 아버지 곁에서 귀동냥으로 러시아의 전설적 베이스 샬리아핀의 노래와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마음 속의 음악'을 꼽아달라고 하자, 그는 뜻밖에 오스트리아 작곡가 레하르의 희가극 《메리 위도우》의 이중창을 꼽았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우리말 노랫말로 배워서, 하굣길 내내 흥얼거렸다. 그래서 이 선율을 들으면 지금도 고향 생각이 난다"고 했다. 레하르의 음악이 화려하기 그지없던 빈의 옛 영화(榮華)를 상징하는 것처럼, 안씨에게는 전쟁 직전의 평화롭던 유년 시절을 반추하는 동기가 된다.
안씨가 소장하고 있는 LP는 1400여장가량. CD와 DVD는 세어보지 않았단다. 지금도 '명(名)연주'만 남겨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음반은 중고로 되파는 것이 원칙이다. 그는 "음반은 모으는 게 아니라 줄이는 것이 진정한 도사이며, 막상 쌓아만 놓고 손대지 않는 것처럼 낭비도 없다"고 말했다.
스스로 "나는 게으른 놈"이라는 안씨는 3년여의 작업 끝에 최근 20세기 지휘자 34명을 열전(列傳)으로 묶은 《불멸의 지휘자》(웅진지식하우스)를 펴냈다. "현지 발음과 최대한 유사하게 써야 한다"며 '필하모닉(philharmonic)'을 '휠하모닉', '시카고(Chicago)'를 '쉬카고'로 외국어 표기법과 다르게 적어놓은 고집은 이번 책에서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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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 애호가인 안동림 前 청주대 교수가 오랜 클래식인생에서 얻은 지혜를모아 명지휘자들을 평한 저서 '불멸의 지휘자'를 펴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