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김진경 기자의 사건 추적] 통신망법 걸려 구속된 30대 [중앙일보] 기사v

푸른물 2009. 7. 7. 07:38

김진경 기자의 사건 추적] 통신망법 걸려 구속된 30대 [중앙일보]

400만 명 정보 빼낸 그는 변종 ‘은둔형 외톨이’

6월 초 서울 중부경찰서 사이버수사대 사무실. 열린 문 틈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귀를 덮은 덥수룩한 머리에 짙은 녹색 남방 차림이었다. 구김 많은 베이지색 면바지는 때에 절어 있었다. 앉은 의자가 불편해 보일 만큼 체구가 컸지만 어깨는 줄곧 웅크린 채였다.

해킹으로 400만 명의 개인정보를 빼낸 김모(34)씨는 10년 이상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낸 은둔형 외톨이였다. 국내에도 이런 은둔형 외톨이가 늘어나는 추세다. 사진은 연출한 것임. [안성식 기자]

“누구예요?” 기자의 질문에 형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해커. 개인 정보를 400만 건이나 빼냈어.” “400만 건이나요?”

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응. 그런데 독특해. 돈 때문은 아니고…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는 거야.” 경찰이 머리를 흔들 정도로 독특한 사람. 기자는 사건의 내막을 알고 싶었다.

경찰에 구속된 김모(34)씨의 혐의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이다. 2005년 이후 여행사·대학·증권사 등 1000여 개 사이트를 해킹해 개인 정보를 빼내온 혐의다. 특별한 해킹 프로그램도 쓰지 않았다. 그는 경찰에서 “인터넷 검색창에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입력하는 방법으로 해킹했다”고 진술했다. 주민번호 공유 사이트에서 얻은 번호를 마구잡이로 검색창에 넣어 허술하게 관리되는 사이트를 찾아 중점적으로 노렸다는 것이다.

현장 확인을 위해 서울 동대문구의 그의 집을 찾은 경찰은 당황했다. 김씨의 방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우리도 10년 넘게 아들 방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했다. 김씨에게 열쇠를 받아 들어간 방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7㎡(약 2평) 남짓한 방바닥은 온갖 종류의 과자 봉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방 가장자리에는 빈 맥주 페트병 200여 개가 장식품처럼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에선 지린내가 심하게 났다. 이불 위에는 오래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서적 네댓 권이 나뒹굴고 있었다. 경찰은 방에 있던 컴퓨터 두 대와 외장 하드디스크 두 개를 압수했다. 컴퓨터에선 그가 유출한 개인 정보 수백만여 건이 담긴 파일이 나왔다.

김씨의 부모는 그 광경을 보고도 무덤덤했다. 경찰에 “아들이 내성적이라 원래 친구가 거의 없고 집에서만 지낸다”고 태연하게 말했다고 한다. 김씨는 서울 중위권 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했지만 곧 중퇴했다. 취업을 위해 한두 차례 원서를 냈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후론 사회 생활을 포기한 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살았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유일한 수입은 집에서 한 달에 한 번 받는 용돈 15만원. 부모는 “PC방 갈 때와 2주에 한 번 빨랫감 내놓을 때 말고는 얼굴도 못 봤다”며 “밥 대신 과자를 많이 먹고, 가족이 같이 식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김씨의 해킹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경찰이 그의 계좌를 압수수색했지만 외부와 돈을 주고받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 역시 “단순한 호기심에서 한 일”이라며 “해당 사이트에 보안이 취약하다는 것을 경고하려고 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그는 보안망이 뚫리는 사이트가 있으면 관리자에게 연락해 이를 경고했다. 그 뒤로도 나아지지 않으면 가입자들에게 전화해 사실을 알렸다. 그가 붙잡히게 된 것도 이런 경고 전화 때문이었다. 그는 최근 모 여행사의 가입자들에게 “그 사이트는 해킹당했다”는 전화를 걸었고, 여행사의 수사 의뢰 때문에 집 근처 PC방에서 덜미를 잡힌 것이었다.

그는 진짜 은둔형 외톨이일까. 신경정신과 전문의 여인중 박사는 “집 안에서만 지내고 친구가 없다는 것을 보면 은둔형 외톨이가 맞지만, 반사회적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특이한 경우”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은둔형 외톨이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상대방을 더 배려하고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취업난과 핵가족화 등으로 국내에도 은둔형 외톨이가 늘어나고 있다며 우려했다. 일본에선 20, 30대 ‘히키코모리’가 1990년대 중반부터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경쟁이 극심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일수록 은둔형 외톨이가 많이 나타난다”며 “이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과 소외된 사람을 포용하는 사회 문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진경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틀어박히다’라는 뜻의 일본어 ‘히키코모루’의 명사형.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집에서만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를 일컫는다. 1970년대 일본에서 학교에 안 가고 방 안에 틀어박힌 학생들이 나타나자 이런 용어가 등장했다. 일본에선 90년대 중반 경기침체로 20~30대 사이에 은둔형 외톨이가 많아져 사회문제가 됐다. 일본 후생성은 6개월 이상 집에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가 일본 인구의 약 1%인 120만 명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에선 아직 공식적인 통계가 없다.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