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부모가 다 큰 자식과 손자까지 업고 살아… 자식 생활비·손자 교육비
경제력있는 노부모가 대줘 "언제까지나 자식 돌보려는 한국 부모 특유의 현상"
"하나뿐인 손자라 능력껏 보태고 싶은데…"
남편과 맞벌이를 하는 회사원 이모(여·32·서울 홍제동)씨는 주중 평일에 시댁과 친정에 번갈아 가며 딸(6)을 맡긴다. 교직에서 은퇴해 연금을 받고 있는 시아버지가 분기별로 50만~100만원씩 손녀딸 유치원비를 보탤 뿐 아니라 장을 대신 봐주는 등 '노력봉사'도 해준다. 이씨는 "처음에는 시부모님께 매달 50만원씩 용돈을 드렸는데, 아이가 크면서 교육비 대고 나면 집 사느라 빌린 은행 대출금 갚기도 빠듯해 오히려 도움을 받게 됐다"고 했다.경기도 용인에 사는 대기업 과장 하모(34)씨는 작년 12월 첫아들을 낳았다. 어머니와 장모가 돈을 모아서 산후조리비용(200만원)을 대주고 수입 유모차(160만원)와 놀이용품 세트(200만원)를 사줬다. 요즘도 양가 어머니가 힘을 합쳐서 2주일에 한 번씩 손자 옷을 사 주고, 분유값·기저귀값에 보태라고 매달 50만원씩 준다.
하씨는 "대기업에 다니지만, 혼자 벌어서 은행 대출금에 생활비까지 내려니 감당이 안 된다"며 "부모님이 과하게 도와주신다는 생각도 들지만, 여유가 있는 편인 데다 첫 손자에게 잘해 주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말리고 싶진 않다"고 했다.
하씨의 어머니(58)는 "옛날 부모들은 '자식들이 손자·손녀를 어떻게 키우나' 하고 지켜보는 입장이었다면 요즘에는 적극적으로 자식 내외와 함께 손자·손녀를 키운다"며 "하나뿐인 내 아들이 하나뿐인 손자를 키우느라 고생하는데 능력껏 보태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라고 했다. 60대 이상 노부모에게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를 타 쓰는 30~40대가 늘고 있다. 장성한 자식뿐 아니라 어린 손자까지 나이 든 부모의 등에 업혀 사는 이른바 '3대(代) 캥거루' 현상이다.
본지 설문조사에 응한 학부모 276명의 한달 가계 수입은 ▲700만원 이상이 10.2% ▲500만~700만원 사이가 22.9% ▲300만~500만원 사이가 42.2% ▲300만원 이하가 24.7%였다. 이들이 전체 사교육비 중 부모에게 지원받는 돈의 비율은 ▲절반 이상(50~100%) 타 쓴다는 사람이 13.3% ▲10~50%를 받는다는 사람이 66.6% ▲10% 이하를 도움받고 있다는 사람이 20%였다.
서울 여의도의 109㎡(33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5급 공무원 김모(35)씨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장인에게 한달에 300만원씩 타서 쓴다. 장인 명의로 된 카드까지 받았다. 이런 식으로 매월 300만~500만원씩 받은 지 5년이 넘었다.
김씨가 장인에게 돈을 받는 건 아들(5) 때문이다. 김씨 아들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영어 그룹 과외를 따로 받는다. 피아노와 수영도 배운다. 한달 교육비만 150만원이 넘게 든다. 김씨는 "집을 살 때도 장인 덕을 많이 봤는데 아이가 크면서 교육비 부담이 커져서 계속 돈을 받고 있다"며 "맞벌이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한달 300만원 정도의 월급으로는 세 식구 생활비를 대면서 아들에게 만족할 만한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했다.
취직하고 결혼해서 자식까지 둔 '중년' 자녀들이 아이들 키울 돈을 부모에게 타 쓰는 이른바 '3대(代) 캥거루' 현상이 확산되면서, 유통업계에서는 '원 차일드 식스 포켓(one child six pockets)'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한 명뿐인 자녀를 위해 부모는 물론 조부모와 외조부모까지 어른 6명이 지갑을 연다는 얘기다.
- ▲ 지난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어린이 의류 매장에서 유모차에 손자를 태 우고 온 한 할머니(가운데)가 옷을 고르고 있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현대백화점이 지난해 백화점 카드 회원 중 60대 이상 고객의 매출내역을 분석한 결과, 이들의 아동복·완구 등 아동용품 관련 지출이 3년 전보다 52.3%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매출 신장률 32.2%보다 20.1%포인트 높은 수치다.
대전 갤러리아 백화점 수입 아동복 매장에 근무하는 최인영(33)씨는 "2003년 무렵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동용품 매장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어린이날 등 특별한 날에만 오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매달 정기적으로 손자·손녀들 옷을 사 가는 60대 이상 고객이 많다"고 했다.
최씨는 "젊은 부모들은 옷 한 벌 살 때도 고민을 거듭하는데, 조부모들은 한번 오면 50만~100만원어치씩 산다"며 "우리 매장 전체 매출의 30~40%가 조부모들 지갑에서 나온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3대 캥거루' 현상은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 두드러지고, 손자·손녀들이 자랄수록 지원 폭도 커진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모 시중은행 PB센터 이모(45) 팀장은 "유동 자산만 수십억원이 넘는 할아버지·할머니 자산가들이 유학 간 손자를 위해서 돈을 부치는 경우가 계속 늘고 있다"며 "아들을 주든, 손자를 주든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 강남에 사는 윤모(73)씨는 미국 유학 중인 고등학생 손자(18)를 위해 매년 5만달러씩 송금하고 있다. 윤씨는 "아들이 고위 공무원이긴 하지만, 두 아들 학비를 모두 감당하기는 벅찬 것 같아서 내가 손자 한 명 학비를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박찬웅 교수는 "'3대 캥거루'는 한국 부모 특유의 '무한책임 애프터서비스'가 자녀가 결혼을 한 뒤까지 계속 연장되는 현상"이라고 했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독립시키는 서구 부모들과 달리, 한국 부모들은 능력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자식을 돌봐주려 하고 자식들도 부모에게 기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박경숙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3대 캥거루' 현상으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경제력이 없는 조부모들"이라며 "'금전적으로 지원해 줄 수 없으니 애라도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 신체적·정신적 부담이 가중된다"고 했다. 김모(여·56·경기 구리시)씨는 손녀(3)를 한달 100만원 하는 사립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아들 부부와 상의했지만 결국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