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상 첫 부자(父子) 수상… 가야금 명인(名人) 황병기·수학자 황준묵씨
"난 얘가 뭐하는지 몰라" "아버지 가야금 소리는어릴 때 제 자장가였죠"
제19회 호암상(湖巖賞) 수상자가 발표된 지난달 10일 아침, 고령 가얏고 축제에 참가하려 집을 나서던 가야금 명인(名人) 황병기(73)씨는 막 걸려온 전화를 받은 부인 소설가 한말숙(78)씨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준묵이가 호암상 탔대! 오늘 아침 모든 신문에 다 발표됐대. 그놈은 어쩌면 엄마한테도 그런 말을 안 해. 아이고, 밉고 이뻐 죽겠네!" 황씨는 다음 날 자신의 홈페이지에 그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한 줄 덧붙였다. '(아내는) 며느리도 오늘 아침에야 들었다고 했다. 나쁜 놈!'올해 호암상 과학상 부문에서 수학자로서는 최초로 수상한 황준묵(45)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는 황씨의 2남2녀 중 둘째이자 장남이다. 황씨 역시 지난 2004년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지난 1990년 호암상이 제정된 이래 최초의 부자(父子) 수상자인 셈이다.
시상식 나흘 전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황병기씨의 자택에서 이들 부자를 만났다. 소리를 다루는 아버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호암재단에서 발표 날 때까지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고 입 다물고 있었던 거예요. 나도 상 받을 때 그 얘길 듣긴 했지만, 그게 대외적으로 얘기 말라는 소리지…. 가족에게는 알려야 한다는 건 상식이지!" 빙긋이 웃고 있던 아들이 멋쩍어하며 해명했다. "저는 제가 확실히 상을 받게 될 줄 몰랐어요. 게다가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전화를 받은 날이 만우절이라…."
- ▲ “내가 호암상을 받은 게 5년 전이니 얘가 나보다 빠른 셈이죠.”“제가 상 받은 것보다는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니 참 좋아요.”호 암상 최초 부자 수상자인 가야금 명인 황병기씨(오른쪽)와 아들 황준묵 고등과학원 교수./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음악가인 아버지와 소설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예술가의 길을 걷지 않고 수학자가 된 이유가 궁금했다. 질문을 들은 아버지가 먼저 "내가 원래 수학을 좋아했어요, 잘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말했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 법대를 나온 수재였다. 아들의 대답은 좀더 구체적이다. "초등학교 때는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화가가 되고 싶었죠. 제 전공이 기하학인데, 기하학은 그림 그리는 것과 상당히 유사해요. 수학자들에게는 '연구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중요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수학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예술가적인 기질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버지는 아들을 키우면서 단 한 번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가가 되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네 자녀 모두에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지만, 황 교수는 그중 피아노를 가장 먼저 접은 자식이다.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책은 많이 사줬지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이 부자는 서로의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릴 때부터 매일 밤 아버지가 연습하시는 걸 들었어요. 가야금 소리는 제게 자장가였죠"라고 하는 아들 옆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난 얘가 뭐 하는지 몰라요. 너 전공이 '복소수(複素數) 기하학' 맞냐?" "아버지, '복소수 기하학(complex number geometry)'이 아니라 '복소(複素) 기하학(complex geometry)'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