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울었던 마리아 칼라스

푸른물 2024. 2. 15. 06:49

8월 25일 화요일 잼잼반은 서울숲에 가려고 했는데 우천으로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는 <마리아 칼라스>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마리아 칼라스가 공연에서 불렀던 오페라의 아리아와 그녀가 생전에 썼던 편지들과

그녀의 일상을  나레이션으로 그녀의 예술과 사랑과 인생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한 영화였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 영화는

그녀가 생전에 수없이 공연했던 오페라의 아리아들이었는데 선이 굵고 강한 그의 얼굴처럼

노래 또한  강하고 힘이 넘쳤으며 고음의 영역에선 강한  폭발력으로  관중들을 사로 잡았다

그녀는 노래만큼 연기력도 뛰어나서 요즘 아이돌 가수 못지 않게  인기가 많아서

어딜가든지 매스컴의 집중세례를 받는 모습이었다

7  년 만에 뉴욕공연엔 티켓을 구하기 위해  이틀 전부터  길에서 자는 모습은

요즘보다 더한 인기 최고의 디바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나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비극은 시작 되었는데

남편이 이혼을 해주지 않아서 애를 태우다가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에서 이혼을 했으나

오나시스가 갑자기 재클린과  결혼하는 바람에 10  년가까이 오나시스 곁을 지키며 사랑을 했던 칼라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여인으로서도 불행의 시작이었지만  배신감과 절망감에 노래에도 이상이 생겨서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비운의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푸치니의 <잔니스키키>에 나오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부르면서 영화는 끝나는데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 일어설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슬픈 사랑과 고독한 인생  뛰어난 예술가였음에도

일찍 세상을 떠난 안따까움이 연민으로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었을 게다

마리아 칼라스의 일생을 보고 나니 그녀의 인생과 사랑이 순탄치 않았기에 그녀의 노래가 목소리가

비극에 더 잘 어울렸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예술과 인생

 

마리아 칼라스는  부모가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이민가서  1923  년 뉴욕에서 1남 2녀의 차녀로 출생하여

1977년  파리  자택에서 약물과다복용으로 인후 피부염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8 살에 피오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엄마가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음악공부에 매진시켰다고 한다

1937년  엄마가  이혼하고 그리스로 가서  13 살인 칼라스를 아테네 음악학원에 등록시키는데

원래는 17  살이라야 들어 갈 수 있는 데 칼라스의 큰 키와 엄마의 치맛바랑의 합작품이 아닌가 싶다

스페인출신  엘비라 데 이달고 에게 음악공부를 하는데 제일 먼저 가서 제일 늦게 집에 가는 열성적인 학생이었으며

오페라 공부를 하기 위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불과 한 학기 만에  익혔다고 하니

그녀의 노력이 어떠했을지는 가히 짐작하고 남을 일이다

1941 년 아테네 극단의< 보카치오> 오페라에서 베아트리체 역할을 맡아 성악가로 입문하게 되고

그때부터 하늘이 내린 목소리라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에 이탈리아의 베로나에 가서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조콘다>에서 <조콘다> 역할을 맡게 되고

후에 이탈리아의 부호인 23 년 연상의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와 결혼했는데

오빠처럼 아버지처럼 의지했으나 이성의 검정은 없었다고 한다

남편이자 스폰서이며 매니저였언 메네기니의 소개로 당대 최고 지휘자인 툴리오 세라핀에게

오페라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어서 유럽으로 가는 날개를 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뻘인 세라핀과는 오랫동안 절연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라트비아타>를 녹음하면서

자기가 아닌 안토니에타 스테라를 고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1959 년 오나시스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고 9 년 동안 곁을 지키는 동안 남편과의 이혼의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탈리아 국적을 버리고 그리스 국적을 얻고서 이혼이 성립됐으나 오나시스는 결혼을 해주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칼라스에겐 말도 없이 재클린과 결혼을 했다고 하니 그 배신감과 절망감에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목소리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오나시스는 칼라스를 사랑은 했지만 사업가인 그는 인간적인 남자라기보다는 섹스어필한 남자로서 자기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칼라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기에 칼라스가 임신했는데도 유산시키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에게는 이미 1남 1녀가 있었기에 유산상속문제가 걸려서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같은 이유로 더 유명한 재클린과 결혼했는데 재키와의 결혼은 행복하지 않아서 다시 칼라스를 찾아 갔고

그 후론  둘은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칼라스는 그당시 세계적인 디바로 명성이 높았으나 그런만큼 안티도 많아서  무명시절에 했던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서

경찰이 고소장을 가지고 분장실로 찾아왔는데 무대관계자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사진이 고스란힌  찍히는 바람에

암표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으며 엄마가 남편에 대한 불만을 딸인 칼라스에게 영향을 끼쳐서인지

메네기니와  결혼한 칼라스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돈을 보내달라기엔 젊으니 벌어서 쓰라면서

보내지 않았다고 하며 그나마 1950 년 이후에는 엄마를 만넌 적이 없을 정도로 가족관계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노래로는 완벽을 추구했기에 상대역인 남자가수가 불성실하게 했다고 공연이 끝난 뒤 분장실에서

귀를 물어 뜯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1958 년 1월 2일 로마에서 신년축하로 <노르마> 공연은 이탈리아 대통령부부와 유명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는 공연이었는데 송년파티를 밤새워 즐기는 바람에 목소리에 이상이 생겨서 1 막만 하고는 공연을 취소하는 바람에

 언론의 뭇매를 받고 그만큼 안티도 엄청났다고 한다

영화에선 분장실이 추워서 감기가 걸려서라고 나오니 아마도 각색이 되었지 싶다

칼라스는 노래로는 자기보다 뛰어난 것은 받아들이지 않아서 오페라의 교과서라고 불리던

이탈리아의 레나타 테발디와도 앙숙이라 불릴만큼 관게가  안 좋았다고 한다

칼라스는 오페라 데뷰 당시에  173 cm에 90 kg이 넘는 뚬보였으나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헵번을 보고는 1 년 만에 감량하여 디바의 여신으로 거듭났고

그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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