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내 삶에도 가을이 왔다

푸른물 2015. 11. 12. 08:18

휘날리는 억새 진노랑 나락밭, 황금 들녘 펼쳐진 남원의 가을… 어느새 삶에도 가을이 찾아와
내가 이땅에서 맺어야할 열매는 더 완전한 행복, 즉 사랑임을… 그 외의 것은 스스로 버려야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주임신부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주임신부
까만 돌담과 노란 유채꽃 그리고 짙푸른, 때로는 비췻빛 바다, 이것이 제주도의 아름다움이다. 짙은 녹색 소나무 숲, 무더기무더기 휘날리는 억새, 그리고 진노랑 나락밭. 이것이 요즈음 내가 사는 남원의 아름다움이다. 굽이굽이 지리산을 휘감고 흐르는 요천, 그리고 그 강 양옆으로 펼쳐지는 황금 들녘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다.

토실토실 잘 영근 나락이 얼마나 예쁜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 행복한 미소가 절로 난다. 나는 보아왔다. 싹이 돋고 연초록 어린 모가 된 나락을 논에 심으면 곧바로 땅 힘을 받아 포기가 번지고 알이 배고 하얗게 꽃을 피우며 파란 낱알을 맺어 이렇게 황금 들판으로 변하는 것을. 이제 그 파랗고 튼실했던 이파리와 줄기가 땅으로 되돌아가고 잘 영근 나락 알갱이는 곳간에 들리라. 그랬구나, 저 벌판의 황홀함은 자신의 할 일을 다 마친 그 이파리들, 그 줄기들이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빛이었다. 마지막 한숨까지도 잘 영근 씨앗을 위해 다 내어 놓는 그 빛, 그 색깔이었다. 때가 차 되돌아갈 때가 되자 아무런 미련 없이 갈 길을 가는 그 빛이 아름답다.

씨앗 한 톨! 그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 다 내려놓는 가을 들녘의 아름다움은 가을 문턱에 들어선 나! 나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지리산을 참 좋아한다. 그리하여 틈나는 대로 지리산에 오른다. 주로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올라 돼지령을 지나 임걸령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돌아오는 길을 좋아한다. 뱀사골이 아니면 천은사 길로 성삼재에 오르는데 천은사 앞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진다. 건장한 청년들이 행인들에게까지 입장료를 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문화재 관람료라 해도 나는 관람객이 아니라 길이 있어 지나갈 뿐인데 그런 사람에게까지 꼭 돈을 받아야 하는 건가 의아해진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억울함이 좀 풀렸다. 지난봄 구례에서 버스를 타고 성삼재에 오르는데 그 버스 안 승객 20여 명에게 관람료를 받다가 내 앞에 와서는 "경로(敬老)시죠?" 하며 그냥 지나가는 것 아닌가. 사실 나는 아직 경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아뇨, 나 아직 경로 아닙니다"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날은 참 묘한 기분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난 진짜 경로 우대자가 됐다.

[ESSAY] 내 삶에도 가을이 왔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경로 우대자! 드디어 때가 왔다. 떠나갈 때가 다가온 것이다. 나에게도 가을이 온 것이다. 이제 곧 나의 주인은 내 밑동에 낫을 댈 것이다. 그러기 전에, 주인님이 내 밑동에 낫을 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잘 영근 씨앗 하나 맺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주인이 기뻐할 것이 아닌가. 사과나무의 씨앗은 잘 익은 사과이고 벼의 씨앗은 잘 익은 볍씨일진대 인간인 나의 씨앗은 무엇일까. 농부는 쌀을 얻고자 나락을 심고 사과를 따고자 사과나무를 심는데 나의 주인은 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나를 이 땅에 내려보냈을까. 나는 안다. 젊었을 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안다. 나의 주인님이 나를 이 땅에 심은 이유는 당신의 '행복'을 나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그러니 내가 이 땅에서 맺어야 할 열매는 행복, 완전한 행복이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다 이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한 도구요 과정이며 수단일 뿐이다. 토실토실 땡글땡글, 때깔 좋고 맛좋은 내 인생의 최종 열매는 '더 완전한 행복' 그것뿐이다. 그런데 이 행복이라는 열매를 어떻게 맺고 어떻게 영글게 하는가. 이제 나는 안다. 행복이란 곧 '사랑이라는 나무의 결실'이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오직 사랑으로만 행복해질 수 있다. 사랑 없는 행복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임과 함께 머무름, 그것이 행복이다. 사랑하는 임과 함께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그것이 행복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사랑하는 그 임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 사랑하는 그 임 외에 모든 것을 다 쓰레기로 여기는 것'이다.

저물어가는 가을 들녘, 참 아름답다. 황홀하다. 그렇다. 저 아름다움, 저 황홀한 빛은 곧 사랑의 아름다움, 사랑의 환희다. 마지막 하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한 것 즉, 생명 그 하나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 곧 사랑 그 사랑의 빛이다. 그래서 저리도 아름답다. 그래서 저렇게 황홀하다. 이제 가을이 저물어간다. 버려야 한다. 꼭 남겨야 할 것 하나, 내 사랑하는 그 임, 그 임 외에 모든 것은 다 버려야 한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 그때 내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빼앗기기 전에 나 스스로 버려야 한다. 그래야 아름답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