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저물녘 / 정의홍

푸른물 2014. 11. 4. 07:17

저물녘 - 정의홍(1956~ )


세월이 허리에 걸려

구부정하게 등 굽은 할머니

키보다 더 큰 폐지 묶음을 끌고

건널목을 건너는데

빨간 신호로 바뀐 지 오래건만

아직 반도 못 건넜다

위태위태하다


일 킬로에 백 사십 원

십 킬로에 천 사백 원

시장 안 강화식당 된장백반은 오천 원

저녁 밥 값은 벌었는지

커다란 폐지 묶음에 끌려가는 할머니

(후략)


우리 동네 폐지도 이 할머니가 걷어간다. 등 굽은 할머니가 낡은 운동화를 신고 폐지 더미를 실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모습은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다. 신문지나 종이 상자를 십 킬로 수집해 보았자 천사백 원이니, 된장백반은 고사하고 라면 사먹기도 힘들겠다. 그런데 이 폐지 수집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아껴 모은 돈 일억 원을 어느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 다음부터 이런 할머니 곁을 지날 때면, 나는 마음속으로 두 손을 모은다. 성자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김광규·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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