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최보식이 만난 사람]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 36년전 발굴했던 김

푸른물 2010. 10. 7. 06:11

최보식이 만난 사람]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 36년전 발굴했던 김정기翁

"고분 열리자 하늘은 벌게졌고, 유물 꺼낼땐 천둥이 쳤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발굴 지시, 이 山만 한 걸 어떻게… 그때 진짜 파기 싫었죠
고분 주인은 화 내실까? 아니면 후세 알려줬다고 기뻐하실까 모르겠네요

"경주 98호분(황남대총을 지칭)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발굴한 것인데…. 그전 우리네 술자리에서 '황남대총을 한번 파봐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미쳤다고 이 산만 한 걸 파느냐'고 막았지요. 그랬다가 결국 내가 미친놈이 된 셈이지요. 발굴 지시가 떨어졌을 때 사실 나는 파기 싫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이 열리고 있지만, 이를 발굴한 것은 36년 전의 일이다. 발굴단장은 김정기 당시 문화재연구소장이었다. 그때는 사십대 중반, 이제 팔순노인이 됐다.

김정기옹은“산에 오르는 사람은 산이 있어 오른다고 하지만, 유적은 있다고 해서 발굴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그는 떨어진 청력으로 오른쪽 귀에 손을 대고 듣는 것 말고는 두 시간가량의 인터뷰 동안 결코 지치지 않았다. 기억과 인용도 바로 어제 일처럼 정확했다. 심지어 "나는 서울에서 보고할 일이 많아 발굴 현장에는 반쯤 있었으니 내가 팠다면 좀 지나칠지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큰 고분을 발굴하는 것은 학자라면 당연히 욕심을 낼 일이지, 파기 싫었다니요?

"황남대총은 한반도에서 제일 큰 고분일 겁니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지요. 산에 오르는 사람은 '산이 있어 오른다'고 하지만, 유적은 있다고 해서 발굴하는 게 아닙니다. 학술적으로 꼭 필요해서 이걸 발굴하면 어떤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하는 겁니다. 특히 하나밖에 없거나, 제일 크거나, 가장 오래됐다는 유적은 될 수 있으면 안 파는 게 좋습니다."

―그런 유적이야말로 더 궁금한데, 안 파는 게 좋다니 무슨 영문입니까?

"아껴야 돼요. 발굴과 분석 기술은 갈수록 발전합니다. 뒷날에 맡기는 것이 좋을 수도 있어요. 또 발굴을 해야 하는 경우와 안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유적인데 그 속을 전혀 모르겠다면 파는 게 옳지요. 뭔지 모르면 그건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속을 대강 짐작할 수 있으면 그냥 놔두는 게 좋아요. 98호의 경우 '적석목곽분'(목제 관곽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무덤)일 거라고 당시 학계에서는 짐작하고 있었어요."

황남대총의 북쪽 무덤에서 나온 금관.

―혹시 전문가의 소신을 내세워 처음에는 황남대총 발굴 지시를 거부했나요?

"대통령의 지시인데 대놓고 반대하면…."

노인은 소년처럼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껄껄 웃었다.

"꾀를 부린 것이 '98호는 그 속에 조그만 무덤군(群)이 모여 큰 산처럼 됐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 그럴 경우 나오는 유물도 없고, 시민들이 숭배해온 고분의 권위만 떨어뜨릴 수 있다. 근처의 다른 작은 고분부터 파보자'고 했지요. 그래서 1973년 '천마총'을 먼저 파게 된 겁니다. 천마총 발굴 성과가 시시하면 그걸로 98호를 안 파는 근거로 삼으려 했던 것이죠."

―그 방편으로 발굴한 천마총에서 가장 큰 금관과 '천마도'가 나온 것이군요.

"매스컴에서 난리가 났지요. 그러나 나는 마음의 부담이 있었어요. 위에서는 '더 큰 황남대총을 파면 더 좋은 게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학계 일부에서는 '황남대총의 유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파지 말고 그대로 보존하자'고 반대했어요. 나로서는 이미 말한 게 있어 안 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반대하는 선생님들에게 미움을 샀어요."

―황남대총 발굴을 후회합니까?

"막상 98호를 발굴하고 나니 학계의 비난은 없었어요. 같은 적석목곽분이었지만, 천마총과는 전혀 다른 구조와 형식이었으니까요. 황남대총은 관곽 위에 돌을 쌓아 올린 게 아니라, 나무로 거푸집을 짜서 먼저 돌을 채워놓은 뒤 안쪽 빈 곳에 목곽을 넣었어요. 적석목곽본의 형식 변화를 알 수 있었지요."

―무엇보다 5만8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니 발굴 성과는 좋은 것이지요?

"일반 사람들은 좋은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이라고 여깁니다. 좋은 유물이 나오면 '발굴을 잘했다' 아무것도 안 나오면 '못했다' 합니다. 하지만 발굴자는 정확하고 실수없이 하느냐에 신경 쓸 뿐입니다. 구조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쌓아올려졌느냐도 문화(文化)입니다. 그 속에 유물이 있으면 나오고 없으면 안 나오는 것이지요. 유물의 존재 여부는 발굴자와 관계가 없는 겁니다. 솔직히 유물이 많이 나오면 발굴자들은 '아이고 골치야'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 보존 처리가 얼마나 까다로워요. 하나하나 도면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어떤 것들은 즉석에서 약품 처리를 해야 합니다."

―가장 오래 보존되는 유물은 어떤 것인가요?

"쇠나 청동은 녹이 슬고 삭지요. 금과 돌이 오래갑니다."

―인간의 시신은요?

"그건 유기물이잖아요."

―황남대총에는 남자 두개골 일부가 남아있었지요?

"통상 그 세월이면 벌써 없어지지요. 돌무더기와 관이 내려앉아 산소가 안 들어가서 그만큼 남은 것입니다."

그는 일본 메이지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도쿄대 공학부 건축사연구실의 조교를 하면서 발굴 작업과 연을 맺었다. 처음 오사카의 사천왕사(四天王寺)터 발굴에서 '초짜'인 그가 땅속에 묻힌 축대를 찾아냈다. 그때까지 일본 발굴단원들이 세 번이나 실패했던 것이다. 그 소문으로 일본 유적발굴이 있을 때면 불러갔고 그는 체계적인 발굴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1959년 귀국해 그는 감은사·안압지·월성해자·황룡사·익산미륵사지를 비롯해, 주거지·패총·지석묘 등 200여곳을 발굴했다. 당시 유적발굴을 맡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를 1969~87년까지 18년간 이끌었다. 그는 "내 삶을 돌아보면 고고학자도 아니고 건축학자도 못 됐고, 그저 땅 파는 발굴기술자로 살아왔다"고 했다.

―그 삶은 단조로운 것입니까?

"일본서 처음 발굴에 참여했을 때 저녁마다 조사원 1인당 정종 1홉씩 나왔어요. '정부 돈으로 왜 술을 먹이냐' 생각했지요. 그때 고참이 '사람이 긴장한 상태로 땅을 파기 시작해 일주일이 되면 머리가 돈다. 술을 마시면 그런 기한을 연기시켜줄 수 있다'고 설명했어요. 정말 그 증세는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제가 발굴단장을 할 때도 현장에서 일을 마치면 저녁마다 술을 먹였어요. 비록 단조롭지만, 저는 사람들과 만나 섞여 있는 것보다 땅을 파는 게 더 좋았습니다. 파는 과정에서 흙이 빠진 구멍이나 망가진 돌만 나와도 금세 흥미를 느끼지요."

―발굴하면서 최고로 흥분한 적은 언제였습니까?

"천마도가 발견됐을 때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어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붙여서 그림을 그린 것 아닙니까. 목곽이 무너지고 그 위를 돌이 눌러 공기가 밀폐돼 그 형태로 남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건 유기물이지요. 1500년 전에 땅속에 묻혔던 것이 무사할 수는 없지요. 속은 다 삭았을 것이고, 들어내려고 손을 대는 순간 가루가 될지 모르지요. 그걸 보는 순간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 나왔다, 잘못 하면 내가 죽는다'고 느꼈어요. 정강이의 힘이 다 빠졌습니다. 가루가 될지도 모를 그 천마도를 내가 무덤 바깥으로 들어냈습니다. 책임져야 할 어려운 일은 직접 하는 게 지휘자의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후세 사람은 살아서 발굴하지만, 죽어서 묻힌 자의 입장에서는 설마 이렇게 발굴될 줄은 몰랐겠지요?

"발굴하는 동안 큰소리로 말하지 말고, 웃지 말고, 콧노래도 부르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향(香)도 피워놓지요. 부득이한 학술적 필요에 의해 그 위대한 분의 무덤을 발굴하는데 그분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권위를 느껴야 하는 것이지요. 무덤의 주인께서 자신의 집을 파헤쳤다고 화를 내실지, 아니면 세상에 다시 자신을 알도록 내놓아서 좋아하실지, 그건 모르겠어요. 나는 무덤 발굴을 안 좋아했지만 안 할 수도 없었어요. 사실 고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말이 많지요.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하늘이 벌겋게 변한다든지…, 그건 사실입니다."

―무엇이 사실이라고요?

"내가 천마도를 들고 무덤 바깥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마른하늘에 억수로 비가 쏟아졌어요. 천둥 번개가 치고 사무실에 들어오기 직전에는 발목까지 삐었어요. 황남대총 발굴 때는 관곽이 드러나자 하늘이 벌겋게 변했어요."

―정말 이런 자연현상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까?

"난 그건 아닙니다. 뭐, 그저께도 하늘이 벌겋던데요. 다만 사람들이 이상하다고들 말하지요."

―발굴을 마친 고분은 겉은 멀쩡해도 속은 비어있겠군요.

"당초 발굴할 때 무덤 속에 있던 흙을 따로 보관해둡니다. 흙 속에는 시신과 그분이 입고 있던 옷이 썩어 있을 겁니다. 흙이 바로 무덤 주인인 것이지요. 발굴이 끝나면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에 이 흙과 발굴경위를 담은 석함을 안치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무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겁니다. 당초 박정희 대통령의 구상은 발굴 뒤 고분 속을 일반인이 관람하는 것이었지요. 못할 것이 없었지만, 훼손이 심하고 아직도 무덤으로 살아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 방편으로 발굴한 천마총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지요."

―무덤이 살아있다고 하니, 영생(永生)을 믿는 쪽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무덤으로서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제 인생관은 사람은 죽으면 원소로 분해돼 흙과 공기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고배.

☞황남대총은…

남북 길이 120m, 동서지름이 80m로 경주 황남동에 있다. 두개의 무덤이 남북으로 맞붙어 있는 쌍분(雙墳)이다. 남쪽 무덤에는 남자가 묻혔고 북쪽에는 여자가 묻혔다. 부부로 추정된다. 신라 마립간(4세기 신라에서 사용한 왕의 칭호) 시기의 왕릉으로 아직 그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분에서 금관, 금제 관꾸미개, 순금 허리띠, 금동칼, 유리병과 유리잔, 비단벌레 날개껍질로 장식된 말안장 꾸미개 등이 출토됐다. 또 제수용품을 담은 항아리 3개에서는 소, 말, 바다사자, 닭, 꿩, 오리, 참돔, 졸복, 다랑어, 농어, 상어, 조기, 전복, 오분자기, 소라, 눈알고둥, 밤고둥, 논우렁이, 홍합, 재첩, 백합, 거북이 조각뼈 등의 흔적이 나왔다.


8일 신라왕릉 황남대총 발굴에 단장으로 참여한 김정기 전 단장이과 인터뷰를 가졌다./이진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