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허남진 칼럼] 박근혜와 썰렁 개그 [중앙일보] 기사

푸른물 2010. 10. 5. 13:01

허남진 칼럼] 박근혜와 썰렁 개그 [중앙일보]

2010.09.23 19:09 입력 / 2010.09.24 00:17 수정

충청도 남녀가 나이트 클럽에 갔다. “출껴?”(남자가 춤을 추자고 권한다) / “혀” (여자도 좋단다)/ “어쪄?”(한바탕 돌고 난 뒤 남자가 그만 추자는 뜻으로 넌지시 묻는다)/ “다 춘겨?” (여자가 아쉬워한다)/ “또 혀?” (남자가 힘든 표정이다)/ “냅 둬” (여자도 흥이 식었다).

오래전에 나온 유머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그중에서 ‘출껴’까지만 소개했다. 그것만으로도 함께했던 여성 의원들이 까르르 즐거워했단다. 밥 자리에서 던진 그의 유머 몇 토막은 순식간에 번져 가는 곳마다 화제다. 그의 힘인지, 유머의 힘인지 놀랍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썰렁 개그로 재미를 톡톡히 봤다. 무엇보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차가운 이미지가 바뀌어 예의 화사하고 포근한 이미지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인터넷에서부터 당장 ‘얼음 공주의 해빙(解氷)’ 운운하며 난리다.

사실 박근혜 표 미소는 나름 위력이 있다. 누구나 웃는 모습이 보기 좋지만 박근혜의 꾸밈없는 미소는 넉넉함과 편안함을 선사하는 묘한 매력을 지녀 사람들을 더욱 매료시킨다. 그러나 한동안 그의 얼굴에선 특유의 미소가 사라졌다. 현 정부 출범 직후 공천 문제로 표정이 굳어지더니 세종시 갈등 땐 얼굴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더불어 그의 지지율도 급락했고 정국은 더욱 가파르고 삭막해졌다.

단호하면서도 매서운 언행을 통해 그는 원칙과 신뢰라는 소중한 덕목을 살려냈다. 반면 포용과 화해, 소통이란 또 다른 덕목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골수 지지자들의 충성도가 더욱 두터워졌는지 모르지만, 비타협적이고 편협한 태도에 텃밭인 보수층에서까지 이탈자가 늘어났다. 실망한 이탈표를 어떻게 다시 끌어모을까. 대선가도에서 그에게 주어진 큰 과제다.

이번에 선보인 그의 썰렁 개그를 통해 사람들은 포용과 소통의 리더십에 대한 작은 가능성을 목도하고 반응을 보였다. 그로선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함으로써 꽁꽁 닫았던 마음을 열었고 대신 예전 미소를 일부나마 되찾은 것이다. 그는 점차 보폭을 넓힐 계획이라고 들린다. 앞으로 그가 어떤 행보를 통해 자신의 미소를 완성해나갈지 궁금하다.

한가위 귀성 모임을 통해 민심은 차기(次期)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는 압도적 1위다. 한때 40%를 웃돌던 그의 지지율이 연초 급락해 27%대를 맴돌았지만 10%를 넘지 못하는 여타 후보들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썰렁 개그 이후 그는 지지율 30%를 회복했다. ‘박사모’들로선 더없이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2년 후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대선 1년 전까지도 지지도가 5%에 못 미쳤으나 20% 이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머쥔 노무현 신화를 되돌아보라. 싸움은 이제부터다.

지난 대선의 화두는 실용(實用)이요, 일하는 대통령이었다. MB가 BBK 의혹과 위장전입 등 폭로전과 흠결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일 잘할 것’이란 믿음이었다. 샐러리맨의 신화와 청계천 새 단장이란 실적이 그런 믿음을 뒷받침했다. 차기 대선은 실적 이상의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투쟁이나 이념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온다던 ‘새벽’은 이미 밝았고, ‘인동초’도 겨울을 거뜬하게 버텨내고 꽃까지 피웠다. 밤과 겨울의 시대가 가고 낮과 여름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이 시대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시대적 내비게이션부터 읽어내야 한다.

대선이 있는 2012년은 지구촌이 요동치는 해다. 미국·중국·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권력 변동이 예정돼 있다.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년이요, 김정일이 70세를 맞아 ‘강성 대국’이 되겠다고 내외에 선포해놓고 있다. 한반도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점치기 어려운 형국이다. 지난여름 한반도를 덮친 100년 만의 폭서와 폭우처럼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새 환경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매력적 리더십은 필수 덕목이다.

차기를 노리는 인물이라면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차기 경쟁은 소통과 신뢰의 기본기를 갖춰야 예선을 통과할 수 있으며, 최종 대결은 비전으로 결판난다. 동북아 변화에 따른 대한민국호의 진로, 유동성이 커진 남북 문제, 코앞에 닥친 지식정보화 문명, 그리고 역시 경제. 담아내야 할 그림 하나하나가 만만찮다. 썰렁 개그만으론 턱도 없다. 박 전 대표가 특유의 미소정치를 복원해야 하는 건 기본에 불과하다. 시대를 이끌 비전, 스마트한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