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ESSAY] 네팔에서 본 어릴 적 내 모습김병종 서울대교수·화가

푸른물 2010. 10. 6. 16:00

ESSAY] 네팔에서 본 어릴 적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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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7.22 23:45 / 수정 : 2010.07.23 01:01

김병종 서울대교수·화가

'길다, 좋으니?'
나는 무심코 공책 선물을 받아쥔 열 살짜리 네팔 소년 눈과 마주쳤다
수십 년 전 뙤약볕 운동장에 널린 선물들
우리 반 여자애가 자기의 크레파스를 슬며시 내밀었다
칠판에 분필로 그림 그리던 나를 기억한 것이다
바로 그 선물이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
네팔에서 만난 건 애달프고도 소중한 어릴 적 내 얼굴이었다

히말라야 설산에는 현자(賢者)가 산다. 세상의 여러 곳으로부터 지혜를 구하러 그 현자를 찾아가는 행렬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길은 멀고 험하여 이른 봄에 출발하여 겨울에 닿기도 한다.

"그대도 혹 지혜를 구하러 히말라야로 가는가." 네팔로 가는 가방을 싸는 내게 친구 P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내가 그곳으로 떠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네팔 대사를 지낸 R선생의 전화 때문이었다. 비전스쿨의 교사(校舍) 준공식이 있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사연이 없지 않았다. R선생은 그곳 대사를 마치고 네팔을 떠나기 전 불현듯 결심 한 가지를 했고, 산지사방으로 그 결심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저는 가난하고 척박한 이 땅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아이들의 해맑고 순수한 얼굴이 눈에 밟혀 도저히 떠나지 못하겠습니다. 가기 전 학교를 하나 세우려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나는 생각날 때마다 미미한 돈을 보내다 말다를 거듭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설레는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학생이 일흔명을 넘어섰습니다. 그곳으로 갈 한국인 교사를 구할 수 있을까요. 드디어 백명이 되었네요. 이제 이백명을 넘어섰습니다. 새 교실이 필요합니다. 컴퓨터가 있다면 좋겠는데요."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성가시다는 생각과 함께 참 좋은 일을 하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다 마침내 두 번째 교사를 짓게 되었다며 함께 가자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권유치고는 좀 강했다. 내가 그곳에 꼭 가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현지에 가서 설명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카트만두는 수도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무너져내리는 듯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가장 안쓰러운 것은 길목마다 한사코 얽혀드는 아낙이며 아이들이었다. 길고 마른 팔에 조잡한 수공예품을 치렁치렁 걸고 다가와 한사코 코앞에 들이대며 애원하는 맨발의 아낙들과 마른 몸에 슬픈 목소리로 뭐라고 얘기하며 끝까지 따라붙는 아이들….

우리가 찾아간 학교는 먼지 풀썩이는 길을 끝도 없이 달려간 산골에 있었다. 버스가 햇빛 환한 운동장으로 들어서는데 감색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서 있다가 우릴 맞아주었다. 한 사람씩 내릴 때마다 아이들이 노란색 천을 목에 걸어주고 꽃송이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나는 꽃을 준 소년의 손을 잡고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작은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름이 뭐니?"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길다' 뭐라고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긴장한 탓인지 콧잔등에는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햇빛은 자글자글 끓고 있는데 정부 관리의 환영사는 하염없이 길었다. 평생 이분들의 은혜를 잊지 마라, 열심히 공부하면 여러분 중에 대통령도 나올 수 있다는 내용 같은 것이었다. 축사가 이어진 뒤 준비해 온 선물이 전달됐다. 길다에게도 공책 몇 권과 색연필이 주어졌다. 선물을 받는 길다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길다, 좋으니?" 물으면서 나는 무심코 열 살짜리 소년의 눈을 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눈은 어디선가 본 듯한 눈이었다. 그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설렘으로 뒤엉킨 눈동자는 바로 수십년 전 나의 그것이었던 것이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풍경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랬었다. 그날 우리도 뙤약볕 내리쬐는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아침부터 몇 번씩 손님맞이 예행연습까지 했는데 막상 한낮이 다 되어서야 교정에 지프 한 대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더욱 기를 쓰며 노래를 불렀다.

교장선생님의 축사와 방문한 분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마침내 순서가 끝나고 차에서 선물이 내려졌다. 우리는 너무 기대에 차 거의 심장이 멎어버릴 지경이었다. 옷이며 운동화와 모자, 학용품 등이 쏟아져 나왔다. 앞줄부터 한 사람씩 선물을 받았는데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 하나를 받아 한동안 귀마개로 쓰고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 그건 여성용 속옷이었다. 내가 받은 건 헌 지갑과 공책이었다.

그런데 부반장 여자아이가 살며시 다가와 제 몫의 선물을 내게 내밀었다. "이건 네가 가져." 크레파스였다. 햇빛 아래 그것은 무지개처럼 빛을 뿜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부러 학교에 일찍 나와 칠판 가득하게 분필로 그림을 그려대던 나를 그 아이는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손에 전해진 그 운명의 선물 하나. 그것은 내 생애를 결정지은 것이 되었다. 정작 그날 학교를 찾아온 분이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길다의 손은 여전히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길다는 그 옛날 학교 운동장에 서 있는 또 하나의 나였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슬며시 길다의 손을 놓고 화장실로 가 대충 눈가를 씻고 나왔다.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열 살짜리 소년은 수줍게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선생님이요." "그래 길다, 너는 참 좋은 선생님이 될 거야." 나는 그 작은 손을 꼬옥 쥐었다.

내가 그곳에 꼭 가야 했던 이유는 곧 밝혀졌다. 청년 교사 하나가 나를 새로 칠한 하얀 벽 앞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가 바로 선생님이 그림 그리실 장소입니다." 벽화를 그리라는 말이었다. "이 산골 아이들은 평생 바다를 본 적이 없답니다. 여기다 바다를 그려주시면 좋겠어요. 그려주실 거죠?" 그는 처음 물어야 할 질문을 맨 나중에 하고 있었다.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팔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 P는 물었다. 히말라야 설산의 도인을 만났느냐고. 나는 히말라야에 가서 현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는 했다. 그것은 까맣게 잊고 있던,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내 유년의 애달프고도 소중한 얼굴이었다